비혈은 땅굴(혈=수도)에 대비함을 이른다. 『묵자』 제62 비혈편은 성를 지킬때 땅굴을 파들어오는 적을 어떻게 막을지,그방도를 자세히 적고 있다.중국 전국시대 초기에 활동했던 묵자는 나와 남 가림없는 박애주의(겸애교리)에 더하여,독특한 평화주의(비공)와 그의 과감한 실천으로 알려져 있다. 그와 그의 제자들은 군대처럼 규율이 엄한 교단을 형성하여,큰나라가 작은 나라를 침공하려 하면,먼저 그 나라를 찾아가 평화를 설득하고,그 효과가 없을 때는 작은 나라편에 참전한다. 「그들은 불속에 뛰이들고 칼날을 밟으며 죽더라도 후퇴하지 않는다」(『회남자』)이것이 「비공」의 뜻이다. 원칙적으로 전쟁을 부인하지만,방위전은 인정한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무력에 의한 전쟁억지론이다.
묵가의 경전인 『묵자』가 상당부분 병법서와 같은 실전론을 포함하고 있음은 이때문이다. 손자병법이 국가전략으로 비롯하여 야전과 대회전의 전략ㆍ전술을 주로 거론하고 있는데 대하여 『묵자』의 병법은 수성전의 방략만으로 시종하고 있다. 「비공」의 당연한 귀결이다.
지금 남아있는 『묵자』 53편중 병법에 관계된 것은 비혈외에 비성문(성문지키기) 비수(수공막기) 등 10편이다. 이들을 읽어서 여러 천년전 전쟁의 한 양상을 알수 있다는 것이 퍽 흥미롭기도 하지만,특히 비혈편을 읽어서는 비혈의 이치가 오늘에도 꼭 들어맞는 것이어서 놀랍다.
『묵자』에 말하는 비혈의 첫째는 높은데 올라 적을 살피는 일이다. 땅굴파기의 징후는 흙이 쌓이는 것과 흙탕물 등이다. 지금같으면 공중정찰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징후가 나타나면 성안에 7m간격으로 우물을 파고 40말들이 큰독을 들여 놓는다. 독안에 귀밝은 사람을 배치하고,엷은 가죽으로 뚜껑을 덮는다. 가죽의 공명을 이용해 땅굴작업의 음향을 탐지하는 것이다. 이번 제4땅굴 탐사에서,과학기술원의 나정웅 박사팀이 개발한 전파탐사기를 활용한 것과 원리는 같다.
다음은 맞굴을 파는 일이다. 맞굴 바닥에는 숯과 겨를 반쯤채운 토관을 좌우 두줄로 깔고 맞굴 입구에 아궁이와 풍구를 설비한다. 굴이 맞닿을 만하면 널빤지를 이어 만든 방벽을 세우고,관통과 동시에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독한 연기로 적병을 쫓는 화학전인 셈이다. 제4땅굴에서는 우리측이 3백30여m의 맞굴을 팠고,연판대신 모래부대 방벽을 쌓았다.
『묵자』를 다시 뒤적이며,하늘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던 옛말을 되새긴다. 여러 천년전의 혈공을 오늘에 되새기겠다는 북의 시대착오가 한편 한심하고 한편 두려워지기도 한다.
다른 한편 우리의 처지가 딱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사이 벌써 10여년,우리는 5백억원이 넘는 돈,수백명의 과학 두뇌를 포함한 막대한 인력과 장비를 동원해 땅굴을 탐사해왔다. 이런 작업을 앞으로 얼마나 더 계속해야 하는가. 그렇다고 우리의 비혈이 완벽하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74년11월14일 정부는 남침 제1땅굴의 발견을 발표했다. 이 기사가 다음날 아침 한국일보 1면의 중간 톱으로 실렸다. 톱은 김영삼씨가 이끄는 신민당의 반유신·개헌요구 장외투쟁이다. 이 지면은 땅굴을 팠다는 것이 미덥지 않아 「설마」하는 편집자의 심정과 장외투쟁 첫날에 땅굴발견을 발표하고 1면톱 보도를 강요하는 정부태도에 대한 의구심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 저항심리탓에 제1땅굴이 1면톱으로 플레이업 된 것은 이틀뒤 대통령의 특별담화,그 다음날 장외에 나갔던 야당이 여당과 함께 공동 결의안을 채택하면서 부터였다. 이 경위는 권력과 언론과 안보의 미묘한 함수관계를 시사한다.
이번 제4땅굴에는 그런 차질이 없었다. 맞굴의 관통이 공개된 것,남침 땅굴의 전례가 있는터라 「설마」가 없은 탓일 것이다. 하지만 땅굴의 의미보다는 땅굴 발견에 따른 국방부와 특정신문사간의 마찰등의 시비가 더 요란한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미덥지않은 것은 정부의 태도다. 땅굴발견이 남북 대화의 악재로 작용할까 걱정해서 사실을 플레이다운하는 듯한 기미가 엿보이는 것이다. 저들이 일방적으로 중단선언한 고위당국자 예비회담의 조기재개를 땅굴발견 사흘뒤에 촉구한 것이 그 한예가 된다. 회담이야 저쪽사람들 마음먹기에 따라 때가 되면 열릴 것이니,오히려 강력한 항의를 제기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땅굴발견 뒤의 정부태도는,국회에서 말썽을 빚은 이아무개 의원의 월남민 발언과,어딘가에서 맥이 통한다. 그는 북에서 싫어하는 월남민 출신을 남북대화에 내보내는 것이 잘못이라고 했었다. 이말에 담긴 지역차별과 모독이 말썽의 초점이었지만,남북대화는 저쪽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아야 가능하다는 그의 발상에 또다른 문제가 숨어 있다. 우리가 일부러 저쪽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지만,그렇다고 저쪽 눈치나 살피고 할말을 않는다는 것은 「맞대고 이야기함」이란 대화의 본뜻에도 어긋나기 때문이다. 땅굴을 제대로 항의조차 못하는 정부의 태도는 그래서 미덥지가 않다.
진정한 대화는,시는 시,비는 비라고 해야만 가능하다. 아무리 남북대화라도 이치는 같다. 적십자회담을 예로 들자면 고향방문단의 교환은 시요,공연단 교환은 적십자 의제외의 것이니 비라 했어야 옳았다. 당초에 이 시비를 분명히 하지 못했기 때문에,이산가족 재회사업은 지금 정돈상태에 빠져있다. 꼭 「피바다」만이 장애는 아닌 것이다.
비혈도 마찬가지다. 비혈은 저쪽이 혈공을 포기하도록 해야만 비로소 완벽하다. 그러자면 땅굴의 비를 분명히 해야한다. 그로해서 남북대화가 일시 중단된다해도 참고 기다려야 한다. 세계적인 추세,민족사의 흐름,시간이 모두 우리 편이기 때문이다. 우리정부에 그만한 철학과 자신과 인내심이 있을까,땅굴을 파거나 말거나,북의 대남적화통일 정책이 그대로이거나 아니거나-하는 듯한 정부의 대화행보를 보며 다시 생각해본다. 【상임고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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