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비행장을 청진으로 착각 폭격/속수무책에 스탈린 겁먹고 불참한국전쟁초기 미공군이 소련비행장을 북한 비행장으로 오인해 폭격했던 사건은 소련의 한국전 불참결정과 맥아더장군의 중도퇴진에 중요한 계기가 됐었다고 오폭사건의 장본인이 주장했다.
오폭사건의 주인공인 앨턴ㆍHㆍ퀀벡씨는 4일 워싱턴 포스트지에 게재한 「소련과의 짧았던 전쟁」이라는 회고기에서 40년만에 오폭사건의 전모를 공개했다.
퀀벡씨는 1950년 10월8일 북한이 청진비행장에서 2백여명의 전투조종사를 훈련 중이라는 정보에 따라 청진폭격의 임무를 띠고 대구기지를 이륙,예정항로를 따라 예정시간만큼 고공비행을 한다음 저공으로 내려가 20여대의 P39전투기가 늘어서 있는 군사비행장을 육안으로 확인한 뒤 공격했다고 밝혔다.
당시 퀀벡씨와 동료인 디펜도르프는 이 비행장이 청진비행장이라는 확신은 갖고 있지 않았다. 2차 대전중 미국이 사용하다 일부를 소련에 넘긴 P39전투기가 북한에 제공 됐다는 정보도 없었지만 지상에서 대공포를 쏘아대자 폭력을 감행한 것이다.
소련이 북한에 전투기를 제공할 것이라는 정보가 있었던데다 항공기의 별모양이 북한의 그것과 유사 했기 때문에 청진비행장이라 믿은 것이다.
권벡씨는 연료사정이 허락하는 범위내에서 실컷 포를 쏴대고 돌아오는 길에 청진근처에는 없는 섬을 보고야 처음으로 뭔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고 회고했다.
당시 이 사건은 국제적인 물의를 일으켰다. 수하야레 흐카비행장으로 밝혀진 이 비행장을 오폭하는 과정에서 소련군이 미처 손도 못스고 당하자 스탈린은 미국의 전력에 겁을 먹고 전쟁을 불참결정을 내렸으며 10월22일 북한에 대한 일체의 군사지원을 중단했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는 또 『맥아더장군이 전쟁을 확대시키려 한다고 우려하던 트루만대통령은 이 오폭사건을 맥아더의 작품이라고 여겼으며 사건직후 맥아더를 웨이크섬으로 소환했던 점으로 미루어 그의 중도퇴진에도 결정적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믿어진다』고 말했다.【워싱턴=이재승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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