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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방소」… 한소수교 「전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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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방소」… 한소수교 「전초」

입력
1990.03.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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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ㆍ2차 모스크바방문의 분석과 전망/소 “YS이력에 대전환” 예고/구 민주땐 「제3당 처지」 돌파구로 추진/브란트 초청 IMEMO 영향력 기대오는 18일 출국,일본에서 1박한후 20일부터 시작되는 김영삼 민자당최고위원의 소련 방문이 정ㆍ관ㆍ재계에서 예상을 뛰어넘는 화제와 관심을 모으고 있다. 김최고위원의 방소일정및 결과 등에 관심이 증폭되고 있는 것은 작년 6월 있은 그의 첫 방소가 「제2야당총재」로서 이뤄졌다면 이번에는 거대한 집권여당의 제2인자 자격을 갖고 「당당히」 모스크바 땅을 밟게되기 때문이다. 또 6공출범 이후 북방정책을 실질적으로 주도해온 박철언정무1장관이 같이가게 되고 몇몇 경제인들이 같은 비행기에 탑승하게 됐다는 얘기도 김최고위원의 방소 비중을 더해주고 있다. 여기에 정주영 현대그룹명예회장이 이미 소련을 방문,현지 경제인들과 활발한 경제협력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는 점도 그의 방소에 의미를 더해주는 요인이 되고 있다.

특히 작년의 1차 방소때 프리마코프 소련연방회의의장이 「2차방소때의 수교문제거론」 약속은 시사하는 바가 지대한 것으로 보인다.

야당총재로서 무모한 것 같이 보이던 「북방외교」를 들고 소련공산당의 권력핵심부를 노크하게 될 김최고위원의 소련방문은 따지고 보면 그의 정치역정만큼이나 곡절깊은 사연과 행운이 묘하게 들어맞은 결과임을 알 수 있다. 그의 1차 방소경위및 결과의 사후분석을 통해 2차방소를 전망해본다.

○북방에 눈돌린 이유

김최고위원의 화려한 변신처럼 그의 북방노크가 성공하고 있는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그가 3당통합의 당위성을 강조하면서 비난했던 여소야대의 4당구조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통령선거참패 후 치러진 4ㆍ26총선에서 그가 이끈 민주당은 제3당으로 전락하고 말았고 이는 곧 「김영삼총재」에겐 심각한 정치위기였다. 그래서 그의 참모들이 돌파구를 찾아 눈을 돌린 것이 6공정부 역시 역점을 두고 있던 북방외교에 동승하는 것이었다.

그는 당시 임시국회 대표연설에서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북경이나 모스크바는 물론 평양에라도 찾아가겠다』고 북방행 의지를 표출했다. 이때 그는 서석재 당시 사무총장을 북경에 보내 자신의 방중문제를 다각도로 타진해 소련보다 중국방문이 앞서 이루어지는듯 했으나 모스크바행 문이 먼저 열렸다.

○소련인과의 첫 접촉

89년 8월 「김영삼총재」는 정말 우연찮게 일본에서 기회를 잡게된다. 동경외신기자클럽 초청회견에서 그는 남북한과 중ㆍ소ㆍ미ㆍ일이 참여하는 「6개국 의원협의체」 구성을 제의하는 연설을 했고 마침 이 회견장에 나왔던 소련의 「뉴 타임스」 동경특파원인 블라디미르ㆍ옵샤니스코프가 단독인터뷰를 요청했다. 이틀후 뉴오타니호텔의 숙소에서 이루어진 회견에서 소련 방문 희망을 강력히 비쳤고,이 메시지는 모스크바의 「뉴 타임스」 편집장인 이그나탱코에게 전달됐다.

김영삼총재는 그해 가을 서울올림픽 취재단의 일원으로 서울에 나타난 이그나탱코와 접촉하며 방소주선을 부탁했다.

이그나탱코의 연결로 교섭을 맡은 황병태의원은 88년 가을부터 주동경 소련대사관을 수시로 드나들며 「김영삼총재」의 방소루트를 타진하기 시작했으며 이그나탱코가 IMEMO(세계경제및 국제문제연구소)의 프리마코프소장의 초청가능성을 동경 주재 소련대사인 소로미예프를 통해 전해왔다. 당시 소련측 초청가능기관은 IMEMO이외에 타스통신 동방연구소였는데 동경의 황의원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김최고위원은 IMEMO의 역할과 기능을 잘몰라 『타스통신 초청이면 좋겠다』고 IMEMO엔 무관심을 보였다. 당시만해도 IMEMO가 어떤 연구소인지 프리마코프의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거의 몰랐다는 게 황의원의 술회다. 또 그때쯤 김대중 평민당총재도 방소를 위한 대소접촉을 하면서 잘알려진 아르바토프 미국ㆍ캐나다 연구소장과 줄을 대고 있어 묘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소로미예프대사는 IMEMO를 강력히 추천했으며 89년 2월 그가 다시 방일했을 때 IMEMO를 초청자로 낙착했다.

○이그나탱코의 방한

89년 2월 프리마코프소장의 초청장을 들고 서울에 나타난 이그나탱코는 김영삼총재에게 『당신의 소련방문은 우주인이 달에 발을 디디는 것과 같으며 당신의 정치이력에 일대변화를 일으키는 사건』이라고 호언했다. 황의원은 프리마코프가 고르바초프 신사고의 이론가라는 부연설명을 강조하며 방소를 홍보하려 했으나 그는 초청자가 썩 마음에 들지않아 흔쾌한 기분은 아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더구나 중평연기파동,문익환목사 방북에 따른 공안정국의 연속,동해후보매수소동 등으로 방소를 눈앞에 두고도 김영삼 당시 총재는 정치적인 위기를 맞아 마음이 약해져 스스로 방소계획을 포기하려고 했고,여론에 민감한 당직자ㆍ비서들은 그의 여행에 비판적이었다. 황병태ㆍ정재문의원 등 교섭을 담당했던 소수만이 「결행」을 주장했다.

○청와대의 지원

당시 김총재의 제1차 소방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청와대의 지원이다. 정부와의 대화통로였던 황병태의원은 1차 방소에 청와대가 어느 정도 지원했음을 시인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황의원은 적극적지원보다는 까다롭게 굴지 않았다는 주장을 하고있다.

당시 청와대는 중평연기후 4당대립으로 정국이 혼미스러운데다 중평연기에 협조했던 평민당이 문목사사건을 기화로 정부와 나쁜 사이가 되어있어 민주당의 협조를 필요로 했다.

즉 김총재의 소련 방문협조를 놓고 일종의 정치적 바터가 이루어진 셈이다.

최근 관훈토론회에서 김최고위원이 밝혔듯이 노태우대통령이 『4당체제는 안되겠으니 연정을 하자』고 제의했던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이다. 즉 민자당의 잉태가 소련방문을 전후한 두차례의 청와대회담이 계기가 됐다는 것은 결과적인 얘기지만 이그나탱코의 예언대로 김최고위원의 정치이력에 일대 변혁과 관련해 재미있는 일이다.

그의 방소중 노대통령이 『중간평가를 안하겠다』고 언급했고 그가 귀국길에 워싱턴 프레스클럽회견에서 『노대통령이 앞으로 중간평가를 안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한 것은 다 이유가 있는 호응이었던 것이다.

○불안속의 1차방소

고르바초프의 신사고를 찬양하기는 했지만 당시 김총재일행은 소련에 대한 구체적인 감이 없이 89년 6월2일 모스크바의 쉐라미치예보 국제공항에 내렸다.

일행은 공항귀빈실을 이용하기는 했지만 마중나온 사람은 프리마코프소장도 아닌 카슬로프라는 IMEMO부소장 뿐이었다. 이때 그의 표정은 실망과 불안의 뒤엉킴이었다. 자신의 방소를 추진해온 황병태의원 얼굴만 연신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날 밤 「김영삼총재」는 자신의 소련방문이 얼마나 뜻깊은 것인가를 알게되었다. 심야에 숙소에 통역만 데리고 나타난 프리마코프는 자신이 고르바초프의 추천으로 공산당중앙위서 연방회의의장에 내정됐다는 사실을 전해줬다. 보드카를 마시며 2시간 진행된 회동에서 그는 우리 정부의 대소 관계개선 입장인 「서독ㆍ소」와 같은 관계정상화를 주장했던 것. 그때 프리마코프는 『당신의 소련방문이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하다』며 『내년 다시오면 수교문제를 거론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을 했다.

6월4일 프리마코프가 연맹회의의장으로 선출되고부터 그의 소련내 활동은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IMEMO주최 세미나에서 독소관계를 한소관계의 모델로 예시하는 「김영삼총재」의 주장에 마르티노프 IMEMO 신임소장은 『소련이 서독과 국교정상화를 하기전 브란트사민당수를 소련에 초청한 것이 우리 IMEMO였다』고 매우 시사적인 발언을 했다.

○허담과의 비밀접촉

그의 1차 소련방문에서 이루어진 사건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장인 허담과의 회담이었다.

6월6일 수행기자단과 일부 수행원을 유명한 모스크바서커스로 따돌리고 2시간에 걸쳐 벌어진 「김­허회담」은 아직도 그 동기가 의혹투성이지만 판문점의 설전과는 다른 형태의 대화로 상호를 이해하는데 좋은 기회였던 것은 분명하다.

이같은 소련방문은 종국적으로 정계개편의 한 심리적 요인이 됐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이제 여권의 제2인자로 다시 소련을 찾는 김최고위원에겐 1차 방소때 무관심의 정도만큼이 반비례해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그가 마음속에 그리는 「한국의 브란트」 이상이 실현될 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김수종ㆍ조재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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