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이란 이름이 떠오를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했다. 71년4월 26살의 젊은이가 간첩사건으로 잡혀간후 『스스로 난로에 뛰어들어 화상을 입었다』는 당국발표가 나오기까지 그 끔찍한 상황을 우리는 공포없이 상상할 수 없었고,그 발표가 전적으로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몸서리를 쳤었다.72년 나는 파리와 베를린의 대학가에서 수많은 포스터와 비라에 인쇄된 그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인권운동단체와 반한단체들은 심한 화상으로 참혹하게 뒤엉킨 그의 사진을 뿌리며 한국의 인권탄압을 규탄하고 있었다. 지난19년동안 그의 사진은 포스터와 비라에 담겨 전세계를 돌고 돌았다.
이제 45살의 중년으로 2월28일 감옥에서 풀려나 우리앞에 모습을 드러낸 서승씨는 기자회견에서 『나의 화상은 거짓자백을 강요하는 고문을 못이겨 몸에 경유를 붓고 난로를 껴안은채 타죽으려다 입은상처』라고 밝히고 『내가 겪은 고통은 분단조국의 고통이라고 생각해왔다』고 말했다.
『나는 재일동포로서 어렸을때부터 차별대우를 받으면서 우리나라,우리민족에게도 뛰어난 점이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었으며 북한을 방문했던것은 단지 북한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다. 나는 남과북을 모두 나의 조국으로 생각했고,통일된 조국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것인지 모색하고 싶었다. 하늘에 맹세하지만 나는 결코 간첩행위를 한적이 없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서울대 대학원에 유학중이던 71년 「재일교포 모국유학생 간첩단사건」으로 동생 준식씨(42ㆍ88년석방)와 함께 검거되어 유죄판결을 받았고,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되어 복역해왔다. 그들 형제의 남ㆍ북한 왕래에서 「간첩행위」가 있었는지 아닌지를 오늘의 잣대로 재는것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1970년대의 상황과 최근의 대변혁을 돌아보면서 그들의 「나라사랑」이 너무 시대를 앞질렀으며,동족상잔의 비극까지 겪었던 분단의 엄연함을 과소평가한것이 아니었던 가라는 반문을 하게된다.
두려움없이 떠올릴수 없었던 서승의 석방,그의 육성을 대하며 우리는 꽁꽁 얼어붙었던 의혹과 공포가 풀리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공포가 풀린자리에 흐르는 눈물을 억제할 수 없다.
국내사정에 어두운채 해외에서 성장하며 「조국」에 눈을떴던 젊은이들이 「간접행위」로 체포되어 감옥에서 젊은날의 20년을 보내야했던 비극은 서승씨 자신의 말대로 「분단조국의 비극」그 자체이다. 그의 참혹한 얼굴을 우리는 두려움없이 응시해야한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다시는 이땅에서 분단이나 이념이 개인의 삶,가족의 삶을 희생시키지 않도록 노력하자』는 우리의 불망비가 돼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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