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쌓인 피로를 풀고 새로운 하루를 기약하는 시민들이 잠에서 깨어나려 하는 새벽,갑자기 창유리가 깨지고 대문에서 현관에서 마루에서 불길이 솟아 오른다.온가족이 속옷바람인 채 맨발로 뛰쳐나와 양동이 세수대야 등으로 겨우 불길을 잡은 뒤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던가」하고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 옆집 뒷집에서도 『불이야』 고함이 터져 나온다.
온 동네 사람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불을 끄고 『누구 다친 사람은 없느냐』고 안부를 물을 때쯤이면 소방차 경찰순찰차 등이 요란한 뒷북사이렌을 울리며 몰려온다.
현장감식과 피해조사를 시작하려는 순간 무전기에서는 『xx동에서 또 방화사건 발생』이라는 다급한 목소리가 쏟아져 나온다.
이런 아수라장이 한달가까이 매일 새벽 벌어지면서 서울 시민의 평화는 산산이 부서졌고 『또 불났어』가 아침인사가 돼버렸다.
얼굴 없는 도깨비불은 이제 일반 주택뿐만 아니라 아파트 비닐하우스 오토바이 승용차 등 대상을 가리지 않고 번지고 있으며 지방에까지 불똥이 튈 조짐이다.
경찰이 방범 총비상령을 내리고 검찰이 진두지휘를 맡겠다고 나섰고 군헌병과 방위병까지 투입됐으나 도깨비불은 꼬리조차 잡히지 않은 채 오리무중이다.
15일 현재 서울에서만 1백16건의 연쇄방화가 일어난 것으로 집계되고 있는데도 경찰은 시국불만자의 소행과 모방범죄로 분류할 뿐 단서는 잡지 못한 형편이다.
경찰의 명예를 걸었다는 방범총비상령이 전문범죄꾼이 아닌 흉내꾼들에게도 뻥뻥 뚫린다는 말인가. 우리 사회에 세상을 향해 불을 던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그토록 많단 말인가.
마침내 사태는 시민들이 『언제는 우리가 치안혜택을 입었느냐』고 분통을 터뜨리며 소화기를 사다 놓고 주민자경단을 조직하는 상황이 돼 버렸다.
경찰 수뇌부에서는 일선 책임자 문책으로 강력하게 수사를 독려하고 있지만 공허한 문책론에 고개를 끄덕일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경찰력의 한계를 탓하고만 있기에는 상황이 급박하다. 신출귀몰하는 발목을 잡는 것은 국민의 자구운동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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