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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얼은 영원히 이땅에/고 함석헌 선생님 1주기를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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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얼은 영원히 이땅에/고 함석헌 선생님 1주기를 맞아

입력
1990.0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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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인 다음에는 차라리 셰익스피어를 못 읽고 괴테를 몰라도 이것은 알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고난중에도 살아있는 한얼을 보기 때문이다. 겉에 말라붙은 더께와 썩은살을 헤치고 오히려 뜨거운 피,뛰는 생살의 만짐이요,풍화 부식된 지각을 뚫고 들어가 백열의 지심을 엿보이기 때문이다」이는 함석헌의 명저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사육신에 관한 유명한 글귀이다.

고난의 역사에서 그리고 수난의 역사에서 사육신에 관해 이렇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함석헌의 저항정신은 60세를 넘어서 맞이하게 된 5ㆍ16 군사혁명에 대하여서도 다음과 같이 외친다.

「혁명은 사람만이 한다. 학생은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먼젓번에도 실패했다. 군인도 사람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번도 군인이 혁명하려 해서는 반드시 실패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민중에 있다. 학생도 군인도 사람이 아니란 말은 그 말이다. 학생 군인 뿐만아니라 관리도 목사도 신부도 교수도 사람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손에 든,잡은것의 이름,그 입은 옷의 이름이다. 사람은 맨사람만이 사람이다. 잎도 꽃도 열매도 나무가 아니요,나무만 나무다. 매양 제 재간,제 맡은일,자격을 저 자신보다 더 중한듯 내세우는데서 일은 잘못된다. 혁명은 다른 것 아니고 그 잘못을 회복하여 다시 근본 모양에 돌아가잠이다. 사람은 서로 맨사람으로 만날때에만 올바르게 행동할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씨□정신을 볼 수 있다. 그가 그렇게 아끼고 사랑했던 씨□을 민중으로 대변되는 맨사람에서 본다. 1962년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처음 미국을 시찰하고 돌아온후 그는 「사상의 게릴라전」을 하기 위해서는 주간지를 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 「사상계」사장 장준하씨와 이일을 상의했다.

그러나 자금관계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오늘의 종교는 신문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그의 끈질긴 생각은 마침내 1970년 4월19일을 기해서 월간 「씨□의 소리」를 발행하기에 이른다. 그는 「씨□의 소리」를 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제 내가 이 잡지를 내는 목적은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한사람이 죽는 일입니다. 씨□의 속에는 일어만 나면 못이길 것이 없는 정신의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어나라는 명령을 받아야지. 누가 명령하나? 하나님 혹은 하늘이 하지. 옳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이 어디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사람이 밥으로만 사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했습니다마는 그 입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입이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지만 말아닌 말씀을 입아닌 입으로 하십니다. …하나님의 입은 사람의 입에 있습니다. 예수 때에는 예수가 했지만 예수 돌아간 후에는 누구나 대신 또 해야 합니다. 예수가 죽은 것은 바로 그때문입니다. 즉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입노릇 하라고. …둘째는 유기적인 하나의 생활 공동체가 생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발적인 양심의 명령에 의해 성립되는 공동체가 되기만 하면 놀라게 활동합니다. …집에는 늙은이가 있어야 합니다.

늙은이는 그 집 양심의 상징입니다. 나라에도 늙은이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지나온 역사로 보아 부득이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부족한 우리끼리라도 중심을 세우도록 힘을 써야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오래전부터 새 중심세력을 기르지 않는한 우리 정치풍토를 고칠수 없다고 주장해옵니다. …… 씨□의 소리를 해보자는 것은 이를 기르기 위해서 입니다」

이렇게 시작한 <씨□의 소리> 는 제2호를 내고는 등록 취소처분을 받는다. 13개월간에 걸친 법정투쟁을 통해 대법원에서 승소판결을 얻어낸다. 그래서 1971년 8월에 제3호를 낸다. 그러나 <씨□의 소리> 의 고난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1980년 7월에 군사정권에 의해 일방적으로 폐간을 당한다. 그때 <씨□의 소리> 는 95호를 내고 있었다. 1988년 7월에 정기 간행물 등록증을 받았을 때는 그는 이미 88세의 노구로서 담도암의 대수술을 받은지 1년이 지난 다음이었다. 1988년 12월에 통권 96호로써 복간호가 나왔을 때 그는 「저들은 씨□을 칼로 자르면 쉽게 죽을줄 알았겠지만 씨□은 죽지 않습니다. 죽는 법 없습니다. 죽이면 죽은 것 같으나 다시 살고 다 죽어 없어졌다가도 굳은 땅껍질을 들추고 일어나는 들풀같은 씨□입니다」라는 마지막 <씨□에게 보내는 편지> 를 병석에서 썼다. 그가 그렇게 아끼고 사랑했던 <씨□의 소리> 는 현재 2월호로써 109호가 발행되고 있다.

그는 자기의 별명을 <바보새> 또는 중국명을 따서 <신천> 이라고도 불렀다. 그는 몇몇 주변인사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말하면서 나를 싫어하는 사람하고는 악수도 하지 말란 말이냐」며 올림픽 공원의 점화식에 노대통령과 나란히 참석했었다.

그의 이러한 모습에서 나는 들사람 함석헌의 평화주의자로서의 편모를 볼수 있었다. 결국 이행사가 그의 마지막 공식행사가 되고 말았다.

붓을 들면 대풍랑을 기르는 서슬이 퍼런 글이 튀어나오고 일단 강당에 올라서면 아무도 감히 입에 담지못했던 천지를 뒤흔드는 사자후를 외쳐대는 그였지만 사사로이 단둘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때는 그의 답변은 언제나 「글쎄」였다. 팔순을 기념하는 석상에서 그의 「글쎄」를 이해해주지 않았던 그의 스승에 대한 안타까움을 말하던 그의 표정에서 그의 삶의 외로움을 보았다.

거지로부터 대통령까지 품에 안고있었던 그의 인격은 학자 언론인 종교인 사상가 교육자 그리고 민중운동가 그 어느 틀에도 끼워 넣기에는 너무나 컸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영원한 이나라의 씨□로 남았다. 그가 그렇게 즐겨 암송했었던 두보의 고백행의 마지막 구절 「지사유인점원차 고래대재난위용」은 바로 그를 가리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오늘로 만 1년이 된다. 세월이 가면 그의 바람에 휘날리던 흰수염과 흰 두루마기 자락의 모습은 잊혀지겠지만 그가 그렇게 외쳤던 씨□정신은 영원히 이땅에 남을 것이다.

혼탁해져만 가는 작금의 정치풍토에서 새삼 이 나라의 늙은이가 그리워진다.<김용준 씨□의 소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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