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 필수요건 「돈 걷어들이기」/잇단 금전추문 불러 당 몰락 위기까지「자민당의 1당지배는 끝나는가」.
24일 하오 가이후(해부) 총리가 중의원을 정식 해산하자 일본의 언론들은 일제히 이같은 헤드라인으로 오는 총선에서 여야역전ㆍ보혁역전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전망하고 있었다.
지난 35년간 일장기가 갖는 의미처럼 욱일승천,현재의회 민주주의국가에서는 그 유례가 없는 1당 장기독재로 집권해온 자민당이 이제 일본 국민들의 엄정한 심판대에 올라선 것이다.
자민당이 어쩌다가 이처럼 추락의 길을 걷게 됐을까.
이에 대한 풀이는 관계학자들이나 전문가들에 따라 각양각색이나 공통된 것은 「장기집권의 타성」과 「권력의 부패본성에 따른 금권정치」,그리고 「파벌정치」로 요약되고 있다. 이 가운데 자민당 쇠퇴의 결정적인 요인은 파벌정치에 기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당을 태동시키고 있는 한국의 1노2김에게는 타산지석이 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자민당은 창당과정에서 보듯 2대 정당인 자유당과 민주당,그리고 1개의 소수당인 개진당 등 3개 정당의 통합이었기 때문에 이념상으로는 보수우익이라는 공동목표가 있었으나 실제 활동에 있어서는 자신들의 소속해 있었던 정당중심으로 자연스레 뭉치게 됐고 이것이 파벌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이 파벌은 60년 초까지만도 8개 파벌로 분화됐다가 64년 사토(우등)정권 이후로는 5개파벌로 정비,지금도 5개의 큰 파벌과 1개그룹이 자민당을 형성하고 있다.
이들 파벌은 2년마다 실시되는 총재선거를 전후로 제휴를 이루기도 하고 적대관계로 대립하기도 하는데 이로 인해 분당 위기가 여러차례 있었다.
자민당 사상 가장 심각했던 때는 지난 79년. 당시 총리였던 오히라(대평)는 76년 록히드 스캔들로 참담한 패배를 당한 자민당의 세 만회를 위해 당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의회를 해산,이해 10월 총선을 실시했으나 결과는 과반수 미달로 나타났다. 그러자 당내 비주류인 후쿠다(복전) 전총리를 비롯,미키(삼목) 전총리,그리고 나카소네(중증근) 등 3개파벌은 연합전선을 펴 오히라의 퇴진을 주장했으나 오히라는 최대파벌인 다나카(전중) 파의 지원을 받아 유임으로 맞섰다.
일본의 헌법에 따르면 총선후 30일이내 의회에서 새 총리를 뽑게 돼 있는데 자민당내에서 총리 후보가 결말이 나지 않자 총리선거에 주류는 오히라를,비주류는 후쿠다를 추천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이같은 이변에 접한 야당은 모두 기권,따라서 의회에서 자민당의원끼리의 투표가 행해지게 됐는데 1차에서 결말이 나지 않자 주류는 친자민계인 신자유클럽의 지지를 얻어 후쿠다의 1백21표보다 17표가 많은 1백38표로 오히라를 총리로 선출했다.
주류와 비주류의 이같은 대립은 조각을 둘러싸고도 계속돼 오히라는 총리 취임후 40일만에 겨우 내각을 구성했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40일 항쟁」이다.
당시 이 내분이 분당일보전에서 겨우 수습이 된 것은 재계의 거센 압력과 당직 및 각료직의 철저한 안배결과인데 자민당의 나눠먹기식 안배는 자민당을 결속시켜온 요인이 되기도 했지만 일본정치를 타락시킨 부정적 측면이 더 강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파벌의 영수로 볼 때는 이같은 안배가 절대 필요한 대목이기도 하다. 그것은 파벌에 할당된 당직과 각료직으로 자파의원들을 파벌에 묶어둘 수 있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면 자민당에서 당직과 각료직을 차지하기 위해선 어느 파벌이든 속해야 하는데,일본각료들의 평균 임기가 1년,길어야 2년인 것은 각 계파의원들에게 골고루 기회를 부여하기 위한 편법의 결과인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같은 잦은 각료직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정치가 안정되고 있는 것은 관료사회의 안정덕분이기도 한데 사실 일본은 세계제일의 관료천국이기도 하다.
따라서 각 파벌의 영수는 당내 최대파벌의 유지를 위해 자파의원을 많이 당선시켜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신인도 발굴해야 하는데 이때문에 일본적인 「오야붕ㆍ고붕」(친분ㆍ자분)관계가 형성돼 창당후 35년이 지난 지금의 자민당은 정당이 아니라 사당의 연립조직처럼 돼버렸다.
특히 파벌의 영수는 자파의 신장을 위해 정치자금을 끌어들이는 재주가 뛰어나야 하는데 이같은 폐해는 지난 87년 다케시타(죽하),아베(안배),미야자와(궁택) 등 소위 3인의 뉴리더 경쟁에서 보듯,결국 리크루트 스캔들로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자민당 몰락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자민당의 파벌정치가 지금까지 그래도 유지되어온 것은 어느파벌도 항상 당내에서 과반수를 차지할 수 없어 당권장악을 위해서는 최소한 2개 파벌이상이 연합하지 않으면 안됐다는 점에서 어쩌면 이것이 「견제와 균형」의 기능을 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자민당의 모든 문젯점이 한꺼번에 노출된 상황에서 맞게 되는 이번 선거는 90년대 일본의 정치질서와 관련,자민당 35년의 공과에 대한 일본국민의 심판이기도 한데 거대신당을 만든 한국의 정치인들에게도 교훈을 줄 수 있는 선거가 될 것으로 주목되고 있다.<동경=정훈특파원>동경=정훈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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