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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벌 이합집산(일본 자민당/내각제 보수대연합의 모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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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벌 이합집산(일본 자민당/내각제 보수대연합의 모델:2)

입력
1990.0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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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파가 5파로… 금권정치 폐단/장수 비결은 타협정신ㆍ완숙한 내각제/한국도 창당보다 지분조정이 성공관건한국의 보수대연합을 두고 일본에서는 이를 보는 시각이 엇갈리고 있다. 그것은 보수신당의 모델이 된것으로 알려진 일본의 자민당이 지난 35년간 장기집권해 오면서 일본정치사에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온점도 크지만 이에 못지않게 부정적인 측면이 많았다는 점에서 이번 한국의 보수대연합이 자칫 자민당의 폐해만을 닮을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에서이다.

이같은 우려는 자민당의 지난 35년사를 일별해보면 한층 극명하게 나타난다.

자민당은 지난 55년11월 요시다ㆍ시게루(길전무)계의 자유당과 하토야마ㆍ이치로(구산일랑)계의 민주당ㆍ개진당등이 통합,이루어진 그야말로 정통보수의 총집합체였다. 이것이 이후 35년동안 금력을 쥔 파벌보스의 이합집산으로 중앙정치가 의원내각제아닌 의원세습제의 정벌로 퇴화하고,재계와 정치인이 돈과 이권으로 얽혀 전ㆍ현직 총리가 구속되는 등 온갖 스캔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부패상을 연출하고 있다.

이 때문에 작년 참의원선거에서는 마침내 자민당이 대패,소수당으로 전락하고 다음달로 다가온 중의원선거에서도 보혁역전의 위기를 맞고있다.

그러나 자민당이 장기간의 안정정권을 통해 일본의 국력을 미국에 버금가는 위치로까지 끌어올린 공적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를 가능케한것은 완숙한 의원내각제의 틀안에서 파벌간권력이양이 가능했다는점과 타협의정신,당직과 각료직의 합리적배분,정책수립에 대한 공동참여원칙이 지켜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새여당이 앞으로 일본자민당식의 파벌운영이 불가피하다면 창당초기의 어려움보다는 오히려 신당결성후 권력배분에 따른 파벌간의 정치적조정과 통합이 성패를 좌우하는 관건이 될것으로 일본 정치평론가들은 보고있다.

자민당은 통합후 당시 민주당총재로서 총리였던 하토야마를 초대총재(총리)로 선출했는데 하토야마는 각파벌을 고루 안배한 거당내각을 구성,이듬해인 56년 10월 일소국교를 정상화시킨후 은퇴한다. 당시엔 요시다도 이미 은퇴한뒤여서 새총재선거에는 기시(안신개) 이시이(석정광차랑) 이시바시(석교담산)등 3명이 입후보했다.

이총재선거는 자민당 35년사를 온통 얼룩지게한 소위 「파벌」「금권」「밀실」정치를 배태시킨 출발선이 된다.

당시 가장 유력했던 후보는 하토야마의 직계로서 간사장을 지낸 기시였다. 그는 상공관료출신으로 전쟁중 각료도 지내 재계의 지원이 컸으며,특히 자유당계의 실력자 사토(좌등영작)는 그의 친동생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1차투표는 예상대로 기시 2백23표,이시바시 1백51표,이시이1백37표로 기시는 과반수에 23표가 모자라 2차투표에 들어가게 됐다. 그러나 2차투표에서 이시이가 이시바시지지로 돌아서는 바람에 이시바시는 기시의 2백51표보다 7표가많은 2백58표로 제2대총재의 대권을 잡게된다.

이총재선거를 계기로 이제까지는 표면에 떠오르지 안은채 잠잠해있던 자민당의 각파벌이 이합집산을 거듭,8개사단으로 모습을 드러냈는데 총재선거를 위해 기시는 3억엔,이시이는 1억5천만엔,이시바시는 8천만엔을 투입한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이시바시는 자금력이 부족,막판에는 당직과 각료직을 공수표로 남발했는데 이시바시는 이 공수표가 문제가돼 지도력에 손상을 입고 와병이 겹쳐 5개월만인 57년 3월 도중하차,총재자리는 기시에게 자연스럽게 계승되게된다.

기시는 총재에오르자 파벌의 해소를 제창했으나 60년의 미일안보조약의 개정을 둘러싸고 파벌의 항쟁이 계속,그뒤를 자유당계의 이케다(지전용인)가 계승한다. 이때부터 자민당은 요시다의 자유당계가 득세하기 시작하는데 이케다의 4년을 거쳐 그뒤를 잇는 사토의 8년은 자민당과 일본의 최성기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자민당은 사토의 후임을 놓고 다시 재편을 거듭한다. 이 무렵은 이케다를 계승한 오히라(대평정방)와 사토를 계승한 다나카(전중각영),기시를 계승한 후쿠다(복전규부),고노(하야일랑)를 계승한 나카소네(중증근강홍),그리고 미키(삼목무부)등 5개파벌로 나뉘었는데 당시의 분위기로서는 장기집권한 사토가 후쿠다에게 정권을 물려주는 것이 순리였었다.

그러나 야심만만한 다나카가 이에 대항,반후쿠다전선을 결성하고 오히라와 나카소네를 끌어들여 72년 7월총재가 되는데 이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것이 바로 나카소네였다.

나카소네는 당시 군소파벌이었으나 다나카와 후쿠다가 접전인 상황하에서는 캐스팅 보트를 쥐고있었다.

나카소네는 처음 후쿠다를 지지키로 선언,후쿠다의 당선이 거의 확정되는듯했으나 막판에 다나카로 돌아서는 바람에 후쿠다와는 메울수없는 깊은 골을 만들게됐다. 나카소네의 이같은 배신행위를 두고 일본의 정치평론가들은 나카소네에게 가자미도리(풍견계ㆍ바람개비)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을 지어주기도 했는데 나카소네가 돌아선것은 다나카로부터 수억엔에 달하는 정치자금이 건네졌기 때문이라는것이 통설이다. 이후 자민당총재는 후쿠다­오히라­스즈키­나카소네를 거치면서 정치제1세대가 물러나고 다케시타(죽하)로 제2세대가 개화됐으나,장기집권으로인한 타성과 부패본성으로 지난 88년 리크루트스캔들과 같은 엄청난 오직사건이 터지게 된것이다.

지금 자민당은 다케시타 아베(안배진태랑) 미야자와(궁택희일) 와타나베(도변미지웅)등으로 대표되는 정치 제2세대가 이끄는 뉴리더의 시대이지만 오는 총선의 결과에 따라 정계가 개편,제3세대인 네오 뉴리더세대로 건너뛸 가능성도있다. 따라서 이경우 자민당의 파벌계보는 또한번 큰 진통을 겪을것으로 보이는데,자민당이 지금 탈자민당을 외치고 있는 판국에 한국의 새여당이 자민당을 뒤좇는다는 것은 출발이 잘못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일본 정치평론가들의 중론이다.<동경=정훈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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