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대통령 두 김에 필요성 피력/작년 5∼7월 회담서도 제의… 의외 긍정/두 김 접근은 작년 7월 실마리ㆍ10월 성사/15일 최종확인,노대통령 결단만 남겨둬○…신당창당의 시말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정계개편 논의는 오래전에 연원을 두고 있어서 시기적 구분이 명확지 않으며,3당의 핵심세력들이 그동안 철저하게 외부와 차단,내밀하게 접촉과 작업을 해왔기 때문이다.
신당의 주테두리는 지난 12,13일 청와대 개별영수회담 때 노태우 대통령김영삼 민주,노김종필 공화총재간에 지어졌으며,이후 여권의 핵심인사들과 두 김총재와 두 김총재의 핵심측근 인사들간에 구체적 합의가 이뤄지는 수순을 밟았을 것이라는 게 대체적 견해이다.
여권관계자들의 얘기를 종합해 볼 때 신당태동의 연원은 1년전인 지난해 1월 3김총재와의 청와대 개별회담이 된다. 노대통령은 당시 외유하고 돌아온 두 김총재에게 각각 정국의 불안과 지역감정의 폐해 등을 해소하기 위해 정계개편의 뜻을 완곡하게 피력했고 두 김총재는 이에 대해 이해를 한다는 뜻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이어 노대통령은 지난해 5∼7월 3김총재와의 회담에서도 『뜻을 같이하는 정치인끼리 새로운 정당을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완곡한 제의를 했고,두 김총재는 부정적 의사를 보이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 3월 중간평가 유보조치 이후 김 민주총재와는 감정의 앙금이 남아있는 상태였으나 의외로 긍정적인 반응을 표시했다는 것.
노대통령이 신당창당에 결심을 하게 된 배경에는 유럽순방에서 얻은 국제정세의 분석이라는 견해가 많다. 실제로 노대통령은 동구의 변화를 현장에서 보고 멀지않아 북한도 변화가 올 것이라는 점과 국내정치도 이에 대응키 위해 변화해야 한다는 점을 여러차례 시사한 바 있다.
노대통령은 지난 연말 5공청산을 계기로 구태의 정치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정치판세가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됐으며,3당합당의 「결행」을 굳힌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이 주도해 신당을 만든다면 가장 확실한 5공청산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여권관계자들은 분석하고 있다.
○…여권내에서 신당창당의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지난주초부터라는 게 정설이다. 이때부터 청와대에서 홍성철 비서실장ㆍ최창윤 정무수석,민정당에서 박준병 사무총장ㆍ박철언 정무1장관 등이 핵심주역으로 각각의 역할을 분담해 신당창당의 준비작업을 서둘렀으며,서동권 안기부장이 민주ㆍ공화 인사들과 작업을 도운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개편구도는 사안의 성격상 입안단계에서부터 청와대의 총체적인 컨트롤을 필요로 했던 것인만큼 구체화작업 역시 민정당보다는 청와대측과 민주ㆍ공화당간의 직접교감이 주효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물론 민정당의 박준규 전 대표와 JP와의 몇차례에 걸친 대좌에서 가속이 붙긴 했지만 대강의 윤곽이 짜여진 뒤부터는 청와대측의 밀사역인 박철언 정무1장관이 협상의 전권을 담당했다는 후문이다.
여권의 개편구도에 임하는 대야 접근방식은 역시 김종필 공화총재를 가교역으로 삼았다고 보아야 하는데 김 공화총재는 박 전대표와 김재순 국회의장ㆍ홍성철 청와대비서실장 등으로부터 기본적인 「감」을 잡았으며 K목사ㆍ전직각료출신인 L씨 등 범여권의 원로급 인사들로부터도 노대통령의 의중을 수시로 전달받았다는 것.
여기에 실무선의 라인으로는 박 정무1장관을 창구로 민주당에서 김동영 사무총장ㆍ황병태 총재특보ㆍ김덕룡 의원 등이,공화당에서 김용환 정책위의장ㆍ김동근 총재비서실장 등이 긴밀한 대화를 나눴던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야당측의 추진대표들은 최근 여권이 마련해놓은 「제2의 안가」에 수시로 참석,구체적 일정 등을 협의했는데 지난 13일 노대통령과 김 공화총재와의 개별회담 이후부터는 사실상 신당결성을 위한 세부작업에 돌입했다는 것이다.
다만 노대통령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와의 회담에서는 노대통령의 합당후 위상문제가 완전 타결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김 민주총재는 합당과 동시에 노대통령의 당적 이탈을 신중히 권유했으나 결국 수용되지 않아 이 문제를 실무진과의 계속 협상항목으로 남겨두었다는 얘기다.
그 이후 여권은 박태준 대표로 하여금 김 공화총재와 만나 이 문제에 대한 타결방안을 모색케 했고 결국 김 공화총재가 또다시 김 민주총재를 설득,결론을 도출한 것으로 전해졌다.
○…3당통합까지 몰고간 민주ㆍ공화의 연대관계는 지난해 10월2일 안양골프장에서 가진 김영삼ㆍ김종필 두 총재의 골프회동이 표면적 시발이다.
그러나 두 사람 접근의 단초는 그해 7월 이전에서부터 발견되기 시작한다. 초기의 접촉시도는 김 공화총재쪽에서 먼저 뻗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시도가 가능했던 것은 두 김총재의 핵심브레인인 민주당의 황병태 특보(당시 정책의장)와 공화당의 김용환 정책위의장간의 관료시절부터의 막역한 사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김 공화총재는 평소의 지론인 보수연합 구상을 김 민주총재에게 타진해보기로 마음을 먹고,두 사람의 두 막료를 통해 이를 김 민주총재에게 전달했다. 당시 김 민주총재 역시 그해 3월에서 5월무렵까지 이어진 중간평가동해선거서석재 당시 사무총장 구속 등 일련의 좌절로 인해 자신의 정치스타일에 대한 한계를 뼈저리게 「각성」하고,4당구도 탈피를 위한 묘방을 궁리하던 시기였다.
김 민주총재는 당시 황 정책의장을 통해 제의된 김 공화총재와의 극비회동을 수락했다. 그러나 이는 김 공화총재가 7ㆍ10 청와대회담후 제시한 5공청산 차선책을 둘러싼 야당내의 미묘한 기류로 무산되고 말았다.
김 공화총재는 지난해 여름내내 「상심」에 쌓여있었다. 청구동 자택에 머물며 바둑으로만 소일하던 김 공화총재가 정계은퇴선언의 「중대결심」을 할 것이라는 소문이 정가에 나돈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를 전후로 김 민주총재는 골프를 재개해보라는 황 특보의 끈질긴 권유를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이는 야당총재로서의 스타일의 과감한 탈피로,김 민주총재 변신의 결정적 신호탄이었다. 김 공화총재와의 골프회동 「결심」을 받아내고 황 특보는 이를 완전히 새로운 정치판을 짜보려는 김 민주총재의 발동이 걸린 것으로 받아들였다.
두 사람의 첫 골프는 대성공이었다. 새판에 대한 공감이 형성됐고,두 사람 사이의 인간적 관계는 갈수록 깊어졌다. 이 무렵 두 사람은 골프장 이외에도 모음식점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하기도 했는데,대취한 김 공화총재가 김 민주총재에 대한 지원의 표시로 손을 들어주기까지 할 정도였다.
12ㆍ15 청와대회담 직후 정계개편 의지를 처음 밝힌 김 민주총재는 새해들어 김 공화총재를 발판으로 「도박」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연초부터 「지자제선거전 정계개편」 발언등 급가속 페달을 밟은 김 민주총재가 김 공화총재와의 사전 교감을 생략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김 공화총재는 3당의 통합은 공동인식이 되 시간을 더 둘 일이라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김 민주총재의 조기정계개편 주장에 영문을 몰라했다고 소식통들은 전하고 있다.
김 민주총재의 드라이브를 김 공화총재는 때마다 받쳐주었다. 1월초순의 골프회동은 김 민주총재의 단독행보를 김 공화총재가 추인해 준 것이었다. 김 공화총재는 특히 1월의 개별영수회담을 거치면서 조기개편론을 펴며 김 민주총재와 보조를 맞추었다. 조기개편에 대한 청와대측과의 교감이 어느 시점에서 일치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여기서 흥미로운 대목은 개별영수회담이 김대중 평민총재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김 민주ㆍ김 공화 두 총재에게는 노대통령과 정계개편을 밀도있게 논의,이를 전격 발표하게 된 결정적 과정이 됐다는 점이다. 두 사람은 김동영 사무총장을 통해 가진 지난 15일의 극비회동에서 3당통합 가능성을 최종확인했고,청와대측과의 마지막 정지는 지난 19일 이루어진 채 노대통령의 결단시점만 남겨둔 상태였다고 전해지고 있다.<조재용ㆍ정진석기자>조재용ㆍ정진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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