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서울에서 바빌론 문물전이 열렸다. 사진ㆍ포스터ㆍ소책자를 놓고 벌인 전시회였는데 이 땅에 바빌론을 소개하는 첫 시도로 주목됐다. 이것은 몇해전부터 국제 바빌론축제를 벌여오는 이라크의 공관이 차린 것이었다. 이라크는 인류문명의 발상지 메소포타미아에 터 잡고 있는 나라인데 이란이라크 전쟁의 종결로 상고문명의 광채를 사방에 투사하려는 문화서곡이 더 활발해지고 있다.인류의 첫 문명은 <두 강물 사이의 땅> 에서 싹을 텄다. 이것이 메소포타미아의 말 뜻이니,두 강이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다. 강기슭에는 대문명이 꽃피었다. 저지여서 범람하는 강물을 다스리는 관개법을 이루고 그들은 첫 농사를 지었다. 그러면서 강변에 도시국가들이 일어났는데 그들은 도심의 고대에 성전을 쌓고,또 궁성과 주거지를 짓는 건축을 일으켰다. 그들은 천문학과 수학을 성취했고 그 기초가 된 건 순 그들이 발명한 문자였다. 두>
진흙판에 기록한 수메르문자판이 대량으로 발굴되면서 그들은 시가와 신화문학의 창시자임이 밝혀졌다. 특히 수메르인의 애가는 후세에 길이 이 서정형식의 전형이 됐다. 첫 법전이 편찬된 것도 바빌론에서였고 이것은 그들의 제례ㆍ가족관계ㆍ거래와 재산ㆍ유산처리 등 관습ㆍ민법ㆍ형법에 관한 법문화를 밝히고 있다.
문명이란 미개상태로부터 탈출하여 생활술을 가르치고 계몽하고 세련하는 일이다. 5천∼3천년전에 메소포타미아에 꽃을 피운 첫 문명은 수메르문명이었다. 수메르는 3천년전부터는 바빌로니아로 불렸다. 바빌론은 고대유대인이 포로로 끌려가 유폐되었던 고장으로 구약에 전해졌다. 『벨사살왕이 그 귀인 1천명을 위하여 큰잔치를 배설하고 그 1천명 앞에서 술을 마시니라…』(다니엘 5ㆍ1∼2) 이렇게 히브리예언자 다니엘은 바빌론의 영화를 적었다. 예루살렘을 침공한 바빌론왕 느부갓네살 왕은 벨사살의 부왕이었다. 그리스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투스는 서기전 4백50년에 바빌론 땅을 찾아 대신전,성탑(지구라트)을 둘러보고 기록했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의 새 발견은 19세기 중반에야 이뤄졌다. 헨리ㆍ로린손이라는 영국 외교관이 게르만샤 부근에서 3개언어 비문이 새겨진 <메소포타미아 마애> 를 발견하여 바빌로니아어 비문을 탁본했다. 메소포타미아의 발굴은 그에 앞서 Pㆍ보타라는 외교관에 의해 착수됐다. 메소포타미아>
그는 앗시리아왕 사르곤 2세의 왕궁유적을 발견하고 파리에 <니네베 발견됨> 이란 전문을 쳤다. 사실은 니네베가 아니라 두르샤르킨이었다. 이렇게 하여 메소포타미아의 베일은 벗겨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고학적 발굴작업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니네베>
최근의 전쟁중 이라크를 찾아간 한 기자는 거기서 옛 문물과 유적을 보지 못했다. 바빌론 고터는 황무지일 뿐이라고 했다. 바빌론의 옛 영화를 눈으로 확인하려면 베를린으로 가야 한다. 왜냐하면 신바빌론(서기전 605∼539)의 영화가 거기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느부갓네살의 궁전의 일부로 이슈타르 여신에 봉헌된 대문과 화려한 통행로가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그것은 남색빛깔의 벽돌로 축조된 거대하고 눈부신 건축물로서 세계에 보존되어 있는 오직 하나의 실물이다. 동베를린의 페르가뭄 박물관이 바로 그곳이다. 문명과 문화의 광채와 전파는 이렇듯 우여곡절이 심하다. 그러나 인류의 첫문명의 광채는 스러지지 않고 거기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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