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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개혁은 1848년 민중혁명비슷”/역사학자들「순환론」한예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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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개혁은 1848년 민중혁명비슷”/역사학자들「순환론」한예 분석

입력
1990.0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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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동 개입 역사역행ㆍ민족주의문제가 과거 교훈역사는 되풀이 되는가.

이같은 물음에 대해 단정적으로 가부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변천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얄타체제를 무너뜨린 89년의 동유럽상황을 빈체제의 붕괴의 원인이었던 1848년의 유럽상황과 비교하고있어 「역사순환」에 대한 관심을 끌고 있다.

즉 「견제와 균형」을 통한 세력안정을 주목표로 했던 빈체제는 피지배계층의 자유와 민족주의적 욕구의 탄압 없이는 불가능했으며,이것이 폭발한 48년의 민중혁명은 스탈린주의적 공산독재에 항거한 동구변혁과 유사하다는 주장이다.

산업혁명으로 산업ㆍ상업사회에 중산층이 형성된 그 시절 지배ㆍ피지배층간의 갈등은 48년 전유럽을 휩쓴 경제공황으로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그 현상타파의 진원지는 1789년 대혁명으로 자유주의적 시민의식이 완숙돼있던 파리였다. 이미 30년의 7월혁명으로 절대군주의 일부가 붕괴되고 이를 대신한 부르주아계층에 식상한 학생ㆍ노동자층이 중심이되어 『정부타도』『개혁만세』등을 외치며 선거법개정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이것이 2월혁명으로 발전돼 시민 지식인과 노동자의 대표들로 구성된 임시정부가 수립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프랑스 제2공화국의 탄생이다.

프랑스의 공화정수립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바로 이웃인 독일이었다. 하나의 민족국가적 체계를 이루지 못하고 느슨한 연방형태속에서 오스트리아ㆍ프러시아의 영향을 받고있던 독일의 각지역에서 자유ㆍ민족주의적인 개혁의 도미노 현상이 일어났다.

먼저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학생ㆍ노동자중심의 시위대가 보수강경의 상징인 『메테르니히 물거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왕궁을 포위하고 시위를 시작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페르디난드 1세는 메테르니히를 해임하는 한편 스스로 자유주의적 신헌법을 발표,시민의 요구인 개혁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변혁은 오스트리아와 한왕국을 이루고 있던 헝가리에 번졌다.

부다페스트 시가지를 메운 헝가리인들의 요구는 마침내 독립된 내각,거의 무제한적 입법권을 가진 의회활동보장등 획기적인 개혁안을 페르디난드1세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었다.

프러시아도 무풍지대일 수 없었다. 이해 3월 베를린에서 벌어진 시민궐기대회는 거의 혁명적 양상이었다. 위기를 느낀 빌헬름4세는 선수를쳐 독일연방 개조안등 일련의 획기적 개혁조치를 연방의회에 제출하겠다고 선언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급진적개혁을 요구하는 시위대와 근위대간의 충돌이 시가전으로 번져 엄청난 희생이 따르자 빌헬름은 보수적 내각을 퇴진시키고 발포책임자인 동생인 빌헬름(후에 빌헬름1세)을 국외로 추방하고 대사면령을 발동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대변혁의 물결도 유럽의 남쪽끝 이탈리아와 동쪽끝 폴란드에서는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이제까지의 체제개혁이 국가라는 내부적틀안에서 이뤄진데 반해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속령이었던 이탈리아와 폴란드의 개혁요구는 「독립ㆍ통일」로 증폭돼 수용의 한계를 벗어났던 것이다.

열강들은 오늘날의 소련처럼 영토의 변혁위기를 느끼게 됐기때문에 강경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나폴레옹의 대군을 몰살시켜 「유럽의 해방자」를 자처하게 된 러시아는 구체제옹호를 위한 노골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반봉건적 농노체제여서 혁명의 전파가 제대로 되지 않는데서 숨을 돌린 러시아는 헝가리민중봉기에 군대를 파견,무력진압으로 혁명적 상황을 모면했다.

결국 1848년의 혁명열기는 2년만인 1850년 단원을 마감했다.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오스트리아ㆍ프러시아등은 절대왕정으로 돌아갔으며,프랑스에서는 대통령이 된 루이ㆍ나폴레옹이 독재자로 변신해버려 혁명이 무의미해 졌다.

48년은 카를ㆍ마르크스가 『공산주의의 망령이 배회한다』고한 「공산당 선언」을 발표한 해이기도하다. 공교롭게도 공산주의의 전환기가 된 89년의 상황은 유사한 과거의 역사를 거울로 삼을 수 있게됐다.

거대한 응집력을 보였던 독일문제등 민족주의문제,체제수호를 위한 보수반동의 개입등은 애써 가꿔놓은 민주화의 역사를 역행시켜 혼돈의 나락에 빠뜨릴 수 있다는 역사의 교훈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동구권국가중 가장 앞서 개방ㆍ개혁을 쟁취했으면서도 민족분열과 경제파탄의 위기에 빠진 유고슬라비아는 자칫 민주화개혁을 이룬 다른 동구권국가들이 빠져들기 쉬운 「정지된 역사」의 전형을 보여주고있다.

역사는 발전이다. 이시대의 발전가능성을 더욱 밝게 해주는 것은 과거역사발전의 흐름을 막았던 소련이 오히려 이를 선도하고 있으며,변혁의 주체인 시민들이 보다 향상된 의식으로 평화적 방법을 택하고 있다는데 있다.<윤석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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