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 점심」에도 가슴은 따뜻/“올림픽공원서 한마당을” 소망/팥죽에 어묵등 “시골 장터”… 꽹과리로 흥 돋우며 수백명 한마음매달 음력보름이면 서울사직공원에서 노인들의 놀이마당이 펼쳐진다. 삼복의 혹서나 엄동설한을 가리지않고 꼬박꼬박 이곳에 오는 노인들은 처음보는 사람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려 춤추고 노래하며 하루를 보낸다. 서울은 물론 안양 수원 의정부 고양 등 경기도에서까지 수백명의 노인들이 모여드는 이유는 단하나,사람이 그립기 때문이다. 소일거리가 없고 말상대도 없는 노인들은 외롭기만 하다. 음력 섣달보름이었던 지난 11일에도 사직공원에서는 4백여명의 노인이 찬바람속에서 흥겨운 어깨춤과 노래로 하루를 보냈다.
상오10시. 공원마당에서는 10여명의 노인과 4∼5명의 차 파는 아낙네들이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마당위쪽 사직도서관과 사직노인정사이 넓은길에는 막걸리 막소주 팥죽 어묵 돋보기 털모자 등을 파는 10여명의 상인들이 좌판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곳에서도 7∼8명의 노인들이 서로 안부를 묻고 자식들 얘기를 나누며 얼굴의 주름을 폈다.
12시가되자 노인들은 2백여명으로 늘어났다. 마당 곳곳에서 노인들이 갖고온 북 징 꽹과리 날라리가 제각기 흥을 돋우기 시작했다. 확성기와 마이크가 달린 대형카셋테이프에서는 흘러간 노래가 구성졌다. 7∼8쌍의 노인들은 사교춤을 추면서 「옛실력」을 과시했다.
하오2시가 되자 노인들은 4백여명으로 늘어났고 노인정앞의 급조된 장터골목이 어묵한조각,막걸리 한사발로 점심을 때우려는 노인들로 빽빽했다. 돈이 없어 점심을 거르는 노인들도 많았다.
10여년전부터 이곳에 나오고 있는 봉모할아버지(86ㆍ서울 성동구 하왕십리2동)는 평소에도 집에서 점심을 먹지 않고 노인들이 모이는 장충단공원에 나가곤 한다. 한달 용돈 3만원에서 차비를 빼면 점심먹기도 힘들지만 말상대없는 집에서 고독과 싸우기보다는 굶더라도 밖에 나오는게 낫다고 한다.
남양주군 미금읍의 최모할머니(67)는 상오9시에 집을나서 버스를 두번 갈아타고 1시간40분이나 걸려 이곳에 왔다. 30년전 남편과 사별하고 외롭게 살다가 5년전부터 사직공원에 나오고 있는 최할머니는 다른 노인들이 노는것을 보기만해도 가슴이 따뜻해진다고 한다.
사고무친인 김정할머니(66)도 『매달 보름이 생일보다 더 좋다』고 말했다.
배화여고뒤 배드민턴장에서 조기회원들에게 차를 팔아 연명하는 김할머니는 보름이면 이곳에 오지만 돈을 안받는 경우가 더 많다.
노인들이 사직공원에 모이기 시작한 것은 20년이 넘지만 왜 이곳이 집합처가 됐는지를 아는 사람은 없으며 또 몰라도 그만이다. 다만 고 육영수여사가 지난71년 9월6일 사직노인정이 문을연 뒤 보름마다 서너차례 노인정을 위문하자 노인들이 많이 모이게 됐다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보름이면 사직공원에 노인들이 모인다』는 말이 퍼지면서 해가 갈수록 숫자는 계속 늘어왔다. 20년전 이 동네로 이사왔다는 사직노인정노인회의 이용출부회장(79)은 『그때에도 많을때는 1천명이상씩 모여 놀았다』고 말했다. 구청과 경찰서는 바로옆이 도서관이라는 이유로 노인들의 유흥을 말렸으나 소용이 없었다.
친구 3명과 함께온 정모할아버지(81ㆍ경기 고양군 신도읍)는 하오5시께 공원을 떠나며 『매일매일이 오늘같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우스갯소리로 주위사람을 항상 웃기던 「키작고 안경쓴 할아버지」의 사망소식,얌전만 빼는 성남할머니의 입원소식을 들은것은 슬프지만 서로 이름과 성을 잘모르면서도 웃고 즐길 수 있는 보름은 더 없이 소중하다.
땅거미가 진 공원을 쓸쓸하게 걸어내려가던 한 노인은 『텅텅비는 올림픽공원 체육관을 한달에 한번이라도 노인들에게 개방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곽영승기자>곽영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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