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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는 친소파 쿠데타”/고비마다 의혹… 불 언론등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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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는 친소파 쿠데타”/고비마다 의혹… 불 언론등 추정

입력
1990.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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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급선회 일사불란… 민중봉기는 촉매 역할”/차우셰스쿠 처형ㆍ구국위 결정 신속도 “증거”견고한 차우셰스쿠 독재를 타도한 루마니아의 「민중혁명」은 실제로는 공산당과 군부의 개혁파 친소세력들이 소련의 지원하에 치밀하게 연출한 쿠데타였다는 분석이 유력하게 대두되고 있다.

구랍 17일 루마니아 남서부 티미시와라시에서의 유혈시위 진압을 시작으로 10여일간 숨가쁘게 진행된 루마니아 사태는 고비마다 숱한 의문점들을 던졌으나 혁명의 열기속에 묻혀졌었다. 그러나 이제 신정권의 정통성 확립등 혁명이 정리단계에 접어들면서 격동의 배후 진실들이 새로이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관심의 초점은 쿠데타의 사전 준비여부와 차우셰스쿠 처형과정,친위보안군의 실제 저항능력 및 보안군에 의한 학살규모 등을 둘러싼 의혹들에 모아지고 있다.

먼저 가장 큰 의혹은 민중봉기가 정점에 이른 상황에서 민중학살을 더 이상 좌시할수 없어 일어선 것으로 알려진 군부의 움직임이 극적인 결단에 의한 것이라기엔 너무나 일사불란했다는데 있다. 루마니아 정규군은 12월 21일에도 수도 부쿠레슈티의 공화국 광장에서 민중시위대를 향해 발포,유혈진압에 가담했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정규군 전체가 일제히 민중의 편으로 돌아서면서 TV방송국 등 주요시설을 동시에 장악했다.

이어 스테판ㆍ구사 군참모총장은 바실ㆍ밀레아 국방장관의 사망소식을 전하면서 모든 정규군은 민중봉기를 지지,수호할것을 지시했다.

여기서 제기된 의문은 밀레아 국방장관의 사망 경위가 밝혀지지 않은 점이다. 일부에서는 그가 차우셰스쿠의 발포명령을 거부,논쟁끝에 자책감을 느껴 자살했다고 전했으나 모반 움직임을 간파한 보안군에 의해 처형됐다는 설도 있었다.

어쨌든 군부의 반란직후 차우셰스쿠가 달아나자 즉각 「구국위원회」란 임시정부가 결성된것도 쿠데타설을 뒷받침 한다. 12월 22일 하오 국영 TV로 방영된 임시정부 지도자들의 회합에서 신임 국방장관이 된 니콜라에ㆍ밀리타루 장군은 『임시정부인 「구국위원회」가 몇개월 전부터 존재해왔다』고 밝혀 외부세계를 의아하게 했다.

차우셰스쿠 정권의 유혈진압에 맞서 군이 거사했다는 논리와는 맞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일리에스쿠등 개혁파 지도자들과 정통 군부세력이 격동의 와중에서 그처럼 즉각적으로 임시정부를 결성,사태를 장악할수 있다는 것도 사전모의가 없이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정을 낳았었다.

사태가 일단 진정된 뒤 사전 쿠데타 준비설이 점차 강하게 대두되자 페트레ㆍ로만 신임 총리등은 이를 단호히 부정하며,「민중 봉기론」을 재차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올들어 프랑스 언론들은 구국위원회가 이미 6개월전 결성돼 크리스마스 이브인 구랍 24일을 거사의 D데이로 잡고 소련측과 접촉해 왔으며,다만 유혈진압사태가 발생하자 거사 시기를 앞당겼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그리고 이같은 쿠데타 사전준비설은 일리에스쿠 구국위 의장이 고르바초프 소 공산당 서기장과 절친한 사이로 사태직전 부쿠레슈티 주재 소 대사관측과 접촉을 유지해온 사실이 밝혀지면서 신빙성을 얻게 됐다. 차우셰스쿠 축출직후 국민적 영웅으로 부각됐던 구사군참모총장이 돌연 임시정부에서 배제되고,역시 소련과 가까운 밀리타루 장군이 국방장관에 기용된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고 있다.

소련의 지원에 의한 쿠데타 준비설의 또다른 근거는 당초 보안군에 비해 장비 탄약 등에서 열세인 것으로 알려졌던 정규군이 실제 전투에서 보안군을 압도한 사실이다. 소련군이 무기ㆍ탄약등을 비밀리에 지원했을 것이란 얘기다.

이와 관련해서 정규군측이 일부러 열세를 가장,전투상황을 며칠간 계속 끌고 갔다는 추측마저 있다. 정규군은 경무장한 보안군에 비해 탱크 헬기 등으로 중무장,처음부터 압도적 우위에 있으면서도 쿠데타 성격을 감추고 보안군의 이른바 「악마적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예측불허의 격전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상황을 왜곡했다는 것이다.

이와함께 군부의 반란 이후 티미시와라시 등의 희생자 규모가 한때 「6만명선」으로까지 과장돼 발표된것도 임시정부측의 전술이었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임시정부측은 사태 진정후 사망자수를 「7∼8천명선」으로 밝히고 있으나 현지 소식통들은 「집단매장지 발굴」 등이 모두 허위이며 실제 사망자는 2천명 이하라고 추산하고 있다.

결국 이같은 의문들과 차우셰스쿠의 체포 및 처형 경위를 둘러싼 의혹등을 종합해 볼때 차우셰스쿠 독재에 최초 반기를 든것은 분명 루마니아 민중들이었지만,사태를 결정한것은 군부와 공산당의 친소세력들과 소련이 합작한 쿠데타였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다.<이재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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