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내서 본 아침의 고봉들 “황금빛 장관”/설산비행 2시간… 공항내리자 고산증/본사 박종우 특파원 한국기자론 첫 입경티베트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89년 12월3일 중국명으로는 서장자치구인 티베트로 향하는 부정기 여객기에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몸을 싣게 되었을 때 지난 2년간의 노력과 지난 며칠간의 승강이가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기자가 처음으로 티베트방문을 시도했던 것은 지난 87년 가을 중앙아시아 취재때였다.
가까스로 티베트입경 허가를 받아 카트만두에 도착한 날이 공교롭게도 수도 라사에서 28년간의 침묵을 깨고 라마승려들이 독립시위를 벌인 바로 그날이었다. 국경은 전면 폐쇄되었고 취재계획도 당연히 취소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국경문턱에서 입경을 좌절당하면서 티베트는 여전히「금단의 땅」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회는 2년만에 다시 찾아왔다. 중국특별취재기회를 얻게된 뒤 그동안 수시로 연락을 취해왔던 북경의 친구에게 티베트방문가능성 여부를 문의해본 결과 『계엄중이라 어렵겠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회신이 왔다.
티베트입경에 대한 수속은 북경에서 간신히 마칠수 있었지만 그것으로 모든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입경허가증을 서장자치구의 대표부가 나와있는 사천성의 수도 성도에서 받아야 하는 또 한번의 절차가 남아있었다. 북경의 친구는 성도로 떠나는 나에게 거듭거듭 당부했다. 『기자라는 신분을 밝히면 모든것이 끝장』이라고.
모든 서류를 완비해 주겠다고 약속을 철석같이 했던 성도의 공안국 직원은 기자를 보고서는 전혀 딴소리를 했다. 개인여행자에게는 허가증을 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통사정을 했지만 서류는 비행기를 타야할 바로 전날 저녁까지도 나오지 않았다. 티베트로 들어가는 비행기는 언제나 오후 시간이면 티베트사막을 강타하는 모래폭풍을 피해 새벽에 출발한다. 이번 비행기를 놓치면 언제다시 비행기가 있는지 알수없는 형편이었다.
다급한 마음에 공안국 직원의 집까지 찾아가 밤새 끈질긴 설득을 한 끝에 허가서류를 거머쥘 수가 있었다. 이때가 새벽 3시. 수년간의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30명 정원의 좌석을 둘러보니 군복차림이 절반이고 나머지 반은 야크 가죽으로 만든 티베트 고유의상을 입은 사람들로 외국인은 분명 나혼자 뿐이었다.
사천성과 티베트를 오가며 장사를 한다는 30대 초반의 티베트인은 기자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옷차림은 달랐지만 생김새가 티베트인과 똑같아 오랜만에 고국을 방문하는 해외동포인줄 알았다는 것이다.
한국은 TV를 통해 익히 잘알고 있다고 말했고 달라이ㆍ라마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사실도 알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달라이ㆍ라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표정이 굳어지며 화제를 돌렸다.
서쪽으로 한시간 가량 날고있는 중에 동이 터오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바라보는 티베트고원은 눈길이 닿는 지평선 끝까지 수천수만의 하늘을 찌를 듯한 설산으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평균 해발 6천m급의 고봉들이 이른 아침 햇살을 받아 봉우리부터 능선까지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는 것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옆좌석의 티베트인은 부탄국경지대에 솟은 민야콩카(7,950m) 남차바르와(7,756m)봉 등 우리 귀에도 낯설지 않은 명산들을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비행 2시간반 만에 해발 3천5백m에 위치한 콩카공항에 도착했다. 땅에 내려서자마자 두통과 함께 어지럼증이 엄습했다. 몇발짝 떼어놓기가 무섭게 숨이 콱 막히면서 심장이 마구뛰기 시작했다. 갑자기 3천5백m 고지대로 올라온 셈이니 고산증세를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다.
콩카공항은 말이 공항이지 그저 거대한 활주로일 뿐이었다. 트럭을 타고 1㎞를 가니 조그마한 공항청사가 나타났다.
그러나 수도 라사까지는 2백㎞를 더 가야한다. 입국수속을 밟으면서 다시한번 티베트땅을 처음밟은 한국기자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늙수그레한 공안직원은 수십년 공항근무중 한국사람은 당신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