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는 한반도와 한국인이라면 반가사유상의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떠올릴 사람들이 많다.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한발을 접고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은 이땅에서 완성된 미술형식의 전형이다. 여려해가 됐지만 한국미술5천년전이 해외에서 베풀어졌을때,한국미의 많은 조형물가운데서 가장 관람자들을 매혹하고 황홀하게 만든 것이 다름아닌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이었다고 하였다.땅 위에서 반가사유상이 가장 많이 제작되어 보존되어 있는데가 바로 한국이다. 그 중요한 것은 33체인데 모두 삼국시대에 만들어졌다. 연대로는 6세기후반에서 7세기중엽까지 약 1세기동안에 집중적으로 제작된 것들로 고구려 1,백제 10,신라 13개가 확인됐다. 그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것이 국립박물관과 덕수궁 미술관이 각각 소장하고있는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다.
일찍이 고유섭은 덕수궁의 미륵반가사유상에 대해 『안면이 방원에 가까운 풍만한 상으로 체소두대의 한이 다소 있으며 유미에 봉안을 반개하고 비량이 첨예하고 난대연위가 단아하다. 구형은 방형에 가깝고 구각에는 다소 완화된 의고소(Archaic Smile)를 띠었으며 인중은 깊고 크다』고 지적했다.
널리 알듯,불상조각은 1∼2세기경 오늘의 파키스탄 변경에서 일어났다. 알렉산더대왕의 인도원정에 따라왔다가 이 지역에 정착한 헬라인들의 후손인 미술공들이 불교의 감화로 첫불상을 만들었다. 간다라미술의 탄생이었다. 간다라불상은 아폴로의 얼굴을 본떠 조각한 것이어서 대체로 모습이 서방풍이고 불상의 눈이 떠있었다. 그런데 불상의 뜬눈이 차츰 감겨가다가 2세기뒤에는 불상이 눈을 감고 동방적 명상의 모습이 됐다한다 (앙드레ㆍ말로의 지적).
반가사유상의 그림과 조각은 불교풍경의 일환으로 간다라에서 시작됐고,불교미술이 동쪽으로 전래되며 용문ㆍ운강등에도 반가사유상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한반도에 이르러 반가사유상은 새로운 장을 열었다. 반가사유상이 하나의 조각형식으로 발달하여 삼국시대에 만개했다. 불상의 얼굴이며 몸매며 양각의 처리와 바른 손으로 얼굴을 짚고 왼손은 무릎위에 놓은 수법이며 엷은 옷차림 등에 고도로 세련되고 우아하며 균제미를 이룬 반가사유상이 출현했다. 불교적 사상과 반가사유상이라는 전통을 이은 것이지만,한반도에서 하나의 독특한 미술형식으로 공전의 대성을 이뤘다. 그것은 신비로운 미의 조형의 탄생이었다.
그리고 한반도에서 반가사유상이 일본으로 출가했다. 그 가장 아름다운 형태가 경도 광륭사의 목조미륵반가사유상(보관미륵)이다. 프랑스철학자 마르셀이 생전에 일본방문 길에 광륭사에 갔다. 미륵보살 앞에서 그는 움직이지 않고 말을 잃어버렸다한다. 그를 안내한 한 일본문인은 농을 곧잘하는 마르셀이 말을 잊고 동방의 고불과 어떤 만남을 가졌을까. 고불은 그에게 무슨말을 건넸을까고 수행기에 적었다.
반가사유상은 웃는 듯 마는 듯 얼굴에 가벼운 고아한 미소를 띠고있다. 사색을 하고 생각에 잠기되 한국의 사유상은 신비스런 미소를 짓고 있다. 그렇다. 한국적인 심성의 비밀은 심오한 생각중에도 고아한 미소를 잃지 않는 것이다. 새로운 일광은 새 사유를 요구한다. 그러나 유연하자. 그리고 고아한 미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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