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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거울/김창열 칼럼(토요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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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거울/김창열 칼럼(토요세평)

입력
1990.0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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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의 시사주산지 뉴스위크(1월8일자)는,루마니아의 유혈사태를 상보하면서,「텔레비전=요새론」을 펴고 있다. 그 설명은 이렇다.전쟁에 있어서의 작전계획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먼저 전술거점을 차지한 다음 궁을 공격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궁에 새 깃발이 오르면 만사는 끝이 난다. 오늘날의 그와 같은 거점은 텔레비전 송신탑이며,궁은 방송국의 앵커석이다. 루마니아사태가 다시 한번 이 사실을 확인했다.

군사법정에 선 독재자 차우셰스쿠는,발포책임을 따지는 검찰관 심문에,대통령궁 광장에서는 총격이 없었음을 들어 항변했다. 그의 말대로 수도 부쿠레슈티 시가전의 초점은 대통령궁이 아닌 방송국이었다. 보안군의 몇차례 방송국 공격을 물리친 것이 민중봉기의 성패를 결정지었다고 할 수도 있다. 텔레비전에 비친 독재자의 참혹한 주검은,혁명성공의 새 깃발이었던 셈이다.

제3차 산업혁명이 가져온 전자매체의 힘은 이처럼 크다. 텔레비전이 없었다면,오늘의 동구변혁이 있을 수 없었다는데 이견을 달 사람은 없다. 텔레비전이 없었다면,북경 천안문사태도 그 충격은 훨씬 덜했을 터이다.

그렇기에 유혈탄압과 함께 중국이 취한 첫 조치중의 하나가 텔레비전 취재의 차단이었다. 북한에서 고정다이얼의 라디오와 텔레비전 수상기만을 공급한다는 것도 다 까닭이 없지않다.

계제는 다르지만,우리도 텔레비전의 위력을 실감하고 있다. 그 두드러진 예가 재작년 연말 국회의 5공ㆍ광주청문회요,다시 지난 연말의 전대통령 증언이다. 이 두차례 국회방송이 80년대의 6공 2년을 규정짓고 결산했던 것이다.

이 두차례 국회방송은 우리나라 정치현실에 관한 1차정보를 온 국민이 공유케 했다. 그 1차정보가 있었기에,우리는 우리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를 점칠 수가 있다. 5공의 실체와 6공정치의 수준을 판단한다. 그래서 5공청산의 미흡과 아울러 6공의정의 미숙을 나무란다. 이런 여론이 오늘 90년의 정치풍향을 결정짓게 될 것이다. 1차정보가 있음으로 해서 우리는 중대한 정치과정에의 참여자가 된다.

그런 뜻에서,우리 정치에 대한 실망이 크면 클수록,아쉬운 것은 우리정치에 관한 1차정보다. 국회가 민주정치의 중심이라면 바로 국회활동에 관한 1차정보다. 그 역할은 백문이 불여일견­텔레비전의 막강한 힘에 기대할 수 밖에 없다. 더 단적으로 말하면 텔레비전을 통한 국회방송의 활성화­일상화다.

미국의 케이블텔레비전 C­Span(Cable Satellite Public Affairs Network=유선위성공공방송)은 10년전 단돈 2만5천달러의 기금으로 발족한 국회방송이다. 79년 4월19일 하원회의의 생중계를 시작한 이래,지금은 하원과 상원을 전담하는 텔레비전 2채널과 라디오 2채널을 통하여 의회의 모든 회의와 청문회를 생중계하며,중요안건에 관한 의원과 유권자간의 토론,의회출입기자들의 해설 등을 24시간 방송한다. 인공위성과 케이블방송망을 통한 그 시청자는 처음의 3백50만세대에서 3천만세대로 늘어났다. 의원들의 활동이 의사당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안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의정활동,의원 한사람 한사람의 행동거조에 미치는 영향,많은 국민이 정치과정을 지켜본다는 의미는 이만 저만한 것이 아니다.

국회의 중계방송은 미국 서독 일본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으나,의회정치의 본산인 영국에서는 국회방송의 금기가 작년11월에야 겨우 풀렸다. 66년이래 장장 23년의 토론끝에 겨우 6개월간의 시험방송을 가결한 것이다. 이에 따라 국회방송공사가 생기고,본 회의장에는 상시 가동하는 무인카메라 8대가 설치됐다. 이로써 난장판으로 호가 났던 회의장 분위기,몸가짐이 볼품없기로 알려졌던 신사나라 영국국회의원들의 태도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의회에서는 돋보기를 끼고 자료를 읽던 대처수상도,안경이 필요없는 큰 글씨 원고를 마련하고 있다.

C­Span은 재빨리 영국의회의 중계도 시작했다. 캐나다하원의 중계는 이미 83년에 시작됐고,유럽 각국 국회도 중요 안건이 있을 때마다 중계한다. 브라이언ㆍ램사장에 의하면,「비교의회론」의 기회를 제공하여 국민들이 의회정치를 보는 안목을 키운다는 것이다. 그 결과,미국하원이 소란하기는 하지만,영국 하원보다는 낫다는 것이 시청자들의 반응이었다고 한다. 우리 국회 전대통령 청문회의 몸싸움과 정회소동을 C­Span채널에 실었으면 그 반응이 어떠했을지 궁금하다.

조지ㆍ오웰은 『1984년』에,시민들 아파트마다 설치된 「흐린 거울 같은 장방형 액자」를 그리고 있다. 대형(Big Brother)의 시민 감시용 텔레비전이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그「장방형 액자」가 시민 감시용이 아니라 정치 감시용의 이기일 수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 이기를 활성화ㆍ일상화한 것이 C­Span인 것이다.

누구나가 말하는 정치 민주화의 요체는 글라스노스트(공개) 한 마디로 그친다. 적어도 의회정치의 마당 만큼은 국민들 눈앞에 있어야 겠다는 것이다. 당장에 C­Span같은 방송망을 구성할 수야 없을테지만 방도는 얼마든지 있어보인다. 가능한대로,현재의 4채널과 심야시간 등을 활용하여 국회방송을 늘리는 것이 그 하나. 의원들의 발언을 속기록으로 남기듯,국회활동을 영상으로 기록하여 보관하며 시민들 요구에 따라 열람하게 할 수도 있다. 지금 진행중인 방송제도 개편 논의에서도 이 문제를 고려할 여지가 없지 않을 것이다.

우리 의회정치의 질을 높이자면 국회방송이 꼭 필요하다. 금배지를 단 대형과 중형과 소형 모두의 거조는 그들을 뽑아준 유권자들이 환히 볼 수가 있어야 한다. 그로써 이른바 선량을 감별하고 가려 뽑을 수가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누구가 진짜 대형인줄을 알게 하는 것이야 말로 정치 민주화의 다시없는 담보가 된다. 섣달 그믐날의 난장판을 되씹으며,이런 생각을 한다.<상임고문ㆍ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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