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소원은 통일」북한서도 애창/47년 부자가 작사작곡/처음엔 “통일”대신 “독립”/74년 가이민… “빨리 통일돼 잊혀진 노래 됐으면”「통일의 90년대」에 우리가 먼저 할 일은 남북의 동질성 회복이지만 노래의 힘은 이미 견고한 분단의 벽을 허물고 있다. 남에서 만들어진 노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은 북에서도 애창되는 민족의 노래가 되었다.
대학생 근로자들이 시위를 벌이는 격동의 현장이든,북의 고향을 그리는 망향의 자리이든 남에서는 계층과 세대,이념의 차이에 관계없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꿈에도 소원은 통일…」이 애창되고 있다.
북에서도 평양은 물론 시골 구석구석까지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없고 학생들이 등ㆍ하교길에 행진하면서 합창할만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모두의 노래가 되었다.
그러나 이 노래가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없다.
『많은 사람들이 제 노래를 부른다니 대단히 영광입니다. 그러나 하루빨리 통일이 되어 이 노래가 「흘러간 노래」가 됐으면 하는 것이 소원입니다』 캐나다의 토론토에 이민와 살고 있는 작곡자 안병원씨(63ㆍ제과점경영)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목터지게 불려지는 분단의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하고 있다.
이 노래는 당초 나라의 독립을 염원하는 예술가부자의 합작으로 태어났다. 지난47년 안씨의 아버지 석영씨(본명 석주ㆍ50년작고)가 중앙방송국 3ㆍ1절특집 드라마의 집필의뢰를 받고 쓴 주제가 가사「우리의 소원은 독립」에 아들이 곡을 붙인 것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삽화가로 동아ㆍ조선일보의 학예부장을 지냈고 소설가 수필가 시나리오작가 영화감독으로 다양한 예술활동을 했던 고안석영씨는 당시 20세이면서도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큰아들에게 작곡을 맡겼다.
2월20일께 가사를 받는 순간 불현듯 떠오른 악상이 있어 안씨는 동소문교회에서 단 1시간만에 작곡을 마쳤다고 한다.
그뒤 남과 북이 완전히 갈라져 분단이 고착된 48년,국교 5학년교과서에 노래가 실리면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로 가사가 바뀌게 됐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봉선화동요회라는 어린이음악단체를 만들기도 했으나 무명이었던 젊은작곡가는 이 노래로 인정을 받아 방송국의 양악 및 어린이음악담당자로 취직까지 했다.
그러나 드라마의 주제가로 방송된 뒤에도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50년3월 50세로 타계한뒤 안씨는 경기여고 경복고 용산고교사,숙명여대 작곡과교수등으로 일하다 지난74년 캐나다로 이민을 왔다.
그동안 분단의 벽이 두터워지고 통일에의 염원이 높아지면서 이 노래는 작곡자도 모르게 민족의 가슴속에 퍼져 나갔다. 캐나다의 교민들도 모이면 으레 「고향의 봄」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목메어 부른곤 했다.
누구의 작곡인지도 모르고 합창하던 교민들은 안씨가 작곡자라는 사실이 소개되면 깜작 놀라기 일쑤였다.
지난해 12월초 뉴욕의 서울대 음대 동창회주최로 토론토연합교회에서 열린 「남북가곡의 밤」이 끝났을때는 7백여 청중이 모두 일어서서 안씨의 지휘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했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최근 북한단에 다녀온 캐나다교민들은 안씨에게 놀라온 소식을 들려주었다. 북의 동포들도 2∼3명만 모이면 이 노래를 부르고 있으며 교민환영연에서도 빠짐없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7월 임수경양이 평양에 간이후 급격히 확산된 이 노래를 북쪽사람들은 『정치적 냄새가 전혀 없는 기막히게 좋은 노래』라고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씨에게는 피아니스트 희숙(연세대교수) 소프라노 희복씨(중앙대교수) 등 음악을 하는 여동생이 있으며 희복씨의 남편은 테너 박인수씨(서울대교수). 이들 음악가족이 한데 모여 통일을 기원하며 이 노래를 합창하는 꿈을 안씨는 잊지않고 있다. 반목과 질시의 역사를 마감해야 할 90년대에 「우리의 소원은 통일」은 화합과 통일을 기약케하는 민족의 성가로 자리잡았다.<토론토지사=이창훈기자>토론토지사=이창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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