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새벽 0시6분 전두환 전대통령은 수행원에 휩싸여 바쁘게 국회의사당을 빠져나갔다. 그 뒤에선 지지자들의 박수와 반대자들의 야유가 부딪쳐 낸 파열음이 원단의 첫 순간을 깨뜨리고 있었다.31일 상오 9시30분 민정의원들의 도열을 받으며 「당당히」 국회의사당에 걸어 들어오던 그 모습대로 의사당을 나갈 수 있을까 하던 우려는 역시 기우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날 전씨가 국회에 머물렀던 14시간중 증언대에 서있었던 시간은 이날 밤 기자회견 형식을 통해 「못다읽은」 답변서를 낭독했던 15분까지 합쳐 2시간 남짓.
이러한 시간의 대비는 증언초부터 여당의 「예우론」과 야당의 「참회론」이 상극적으로 드러났을 때 이미 예고된 것이기도 했다.
결국 전씨는 89년과 90년이 엇갈리는 시점을 잡아 대기실에서 회견형식의 독자성명으로 자신이 준비했던 할 말은 다했다. 그러나 그시간 국회5공ㆍ광주특위 연석회의장에선 야당의원들의 전씨 성토와 울분토로가 고비를 치닫고 있었다.
이들은 이날의 전씨증언이 5공청산 수순이 아니라 「5공무산」을 선언한 것이라며 새벽 0시40분까지 분을 삭였다.
이렇듯 여야가 손잡고 5공청산의 통과의례로 치르려했던 전씨증언은 여야가 서로 증언중단의 책임을 떠넘기는 가운데 80년대의 끝을 뒤헝클고 지나갔다.
그러나 이날 전씨증언의 시말을 재차 반추하면 전씨가 떠난 그자리에 또 하나의 의미가 각인돼 있음을 발견케 된다.
확실히 전씨는 자신이 「말하려는」 것만 얘기하고 「말해야 할」 것은 언급치 않았지만 증언대에선 전씨 모습이 상징하는 역사의 엄정성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 엄정성은 우리 역사에 미완의 장을 하나 더 얹어 놓는 부정적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이같은 뒤엉킴은 1차적으로 어차피 한계성을 갖고 있는 전씨의 자기방어적인 증언에서 비롯됐음은 물론이다. 반면 증언대의 전씨에게 육탄돌격하고 명패를 던지며 욕설을 내뱉는등 일부 야당의원들의 무분별한 행동도 개운찮은 증언의 시말을 초래한 데 한몫을 한 셈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전씨증언이 우리에게 무엇이었던가』라는 본래적 물음에 생각이 이르면 미완의 청산은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될 수 있을 것 같다. 이지러진 역사는 결코 덮여질 수 없으며 잊을 수 없음으로 해서 반복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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