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공특위/「일해」 기탁자 특혜없었다/10ㆍ27법난 종교탄압 인상줘 가슴아파/공직자해직 감정적 처리 있었을 수도/기업ㆍ개인에게 정치자금 받은 적이 있다.지난해 11월 참회의 고별사를 드리고 국민여러분 곁을 떠나 산간벽지의 한사에서 반성과 수도의 길을 걸어온 제가,오늘 이처럼 국회에 나와 다시한번 국민여러분에게 언짢은 문제들에 관해 말씀을 드리게 된 것을 매우 송구그럽게 생각합니다.
오늘은 80년대를 마감하는 섣달그믐날인 동시에 21세기를 향한 길목에서,밝아오는 1990년대의 첫해를 맞이하게 되는 전야입니다.
송구영신하는 이 뜻깊은 시점에서,한때 이 나라의 대통령을 지낸 제가 새아침의 여명속에 희망과 기쁨의 말씀을 드리지는 못할망정 지난날의 어두웠던 기억과 아물어가던 상처를 일깨우게 되는 말씀을 드리게된 것이,다름아닌 저 스스로에서 비롯된 것임을 되새길 때 새삼 저의 부덕을 뉘우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삼권분립주의의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하고 있는 세계 어떤 나라에서도 아직 한번의 선례도 없는 전직대통령의 국회출석 증언이라는 오점을 우리 헌정사에 남기게된 것은 저의 씻을 수 없는 또하나의 과오가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모두가 원천적으로 저로 인해서 초래된 하나의 업보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으며,이에대해 국민과 역사앞에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도 기억하시리라고 믿습니다만,지난해 11월 서울을 떠나 사죄의 은둔생활을 시작하면서 국민 모두가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를 떨쳐버리고 단합해서,새로 출범한 정부를 도와 국가발전을 지속해 나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였습니다.
저와 저의 재임기간중에 있었던 일때문에 가슴깊이 한이 맺히고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분들에게는,저의 운둔이 그 모든 아픔에 대한 보상이 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그당시 저는 그이상의 어떠한 단죄도 달게 받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언론을 통해 나타난 여론이나 정치권의 요구는 「재임중의 과오를 사과하고,남은 정치자금이 있으면 헌납하고,고향에 가서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과거청산문제가 마무리될 수 있다는 말을 믿고 저는 그 제의를 전폭 수용해서 실천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저 스스로 근신하는 뜻에서 낯설고 인적도 드문 백담사를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간 일부에서는 해외 장기여행을 권유하기도 했습니다만,그것이 저로서는 죽음보다 오히려 감내하기 어려운 일일 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국민의 자존심을 손상시키는 수치스런 일인 만큼 거론되는 일조차 없어야 한다고 저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권이 제시한 해결책이 모두 실현되었음에도 불구하고,우려했던 바대로 과거청산 논란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으며,저의 국회출석 증언문제가 또다시 제기되었습니다. 「5공청산」문제는 정치의 안정과 국가발전을 가로 막는 걸림돌이 되었으며 저의 국회증언이 실현되지 않음으로써 정치는 물론 경제도 계속 뒷걸음질치게 되고,사회의 혼란과 갈등도 모두 저의 증언문제 때문이라는 분위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전직대통령의 국회증언이 결코 바람직스러운 일이 아니며,세계 어느나라에서도 전례가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이 문제의 해결없이는 정치사회의 안정과 발전도 기대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 저는 정치권이 바라는 바 그대로 하기로 하였습니다.
저는 저의 국회출석증언이 하루속히 실현되기를 희망하였으며,또한 그 증언도 당초의 목적에 부합되는 증언이 될 수 있도록 증언의 방법ㆍ절차ㆍ시기 문제 등은 정치권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야가 합의하고 국회가 결정한 바에 따라,제가 오늘 이자리에 서서 의원여러분의 질문에 대한 증언을 하게 되었습니다만,제증언의 내용이 의원 여러분에게는 미흡하게 느껴지는 점도 없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것은,앞으로의 증언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될 것입니다만,질문자체가 실무자들이 한일,실무자들만이 알 수 있는 일,또는 저 자신이 당시에는 보고를 받았고 재가를 한 일이라 하더라도 세월이 많이 지나서 기억이 나지 않는 일일 경우,지금 이 시점에서 완벽하고 책임있는 설명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의 질문중에는 간단하게 「아니다」,「모르겠다」 등의 한마디로 답변을 끝낼 부분도 있고,또 보다 정확히 이해하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줄거리를 갖추어 말씀드리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질문의 순서에 상관없이 사안별로 묶어서 말씀드리게 된 데 대해 양해를 구하는 바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여러분의 질문에 대해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본인의 재임중에 있었던 일로서 질문서를 통해 제시된 몇가지 의문점에 대한 답변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일해재단 설립배경
일해재단의 설립배경및 자금조성에 관련하여 당초 23억원을 모금하기로 했던 순수한 유족지원 문제가 어떠한 이유로 재단설립에 이르게까지 되었느냐,정관이 바뀔 때마다 설립목적이 추가된 이유는 무엇인지,퇴임후 정치적 영향력 행사를 위한 장소로 설립한 것이 아니냐,기금모금 과정에서 강제성이 있었지 않았느냐하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또, 재단부지에 대한 녹지규제 해제를 지시하지 않았느냐,제2영빈관이 일해재단내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느냐,이러한 세부문제들이 특정인에 의해 비밀리에 추진된 이유는 무엇이냐하는 질문에 대하여 답변드리겠습니다.
일해재단의 설립은 버마 아웅산참사후 귀국하는 길에 본인과 동행했던 경제인들이 북한의 만행에 울분을 토로하고,이러한 비극이 재발되어서는 안된다는 비장한 분위기속에서 순국자의 유가족을 도와야 한다는 공감대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시발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취지에서 그 당장에 23억원이 모금되었으나 『전액을 그대로 집행할 경우 세금 등의 문제로 유족 지원금이 상당부분 줄어든다는 것과 공익재단을 설립하게 되면 전액을 보조금으로 지급할 수 있다』는 보고를 접하고 그렇다면 재단설립을 검토해보라고 지시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유가족에 대한 조의금 분배만을 위해 재단을 설립하는 것이 지나친 편법이 아니냐는 의견과 순국자의 유지를 받들 사업을 모색하는 것이 좋겠다는 등의 의견이 제시되었습니다.
버마 아웅산참극의 근본원인은 조국분단에 기인하는 것이며 분단을 극복,통일을 앞당기는 것이 희생자들의 숭고한 소망이자 유사사건을 방지하는 근본치유책으로 여겨져,가신분들의 넋을 위로하고 유지를 받들기 위해서는 한차례의 보조금 지급으로 유가족사업을 끝내는 것보다 영속적인 사업으로 발전시켜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본인의 생각과 재단 설립에 관여했던 많은 분들의 뜻이 합치되어 안보및 통일문제를 연구하는 부설 연구소를 설립하여 통일에 조금이나마 밑거름이 될 수 있도록 해보자는 방향으로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유가족 지원사업은 설립이후 계속 확대되어 왔을 뿐 아니라 보다 높은 차원에서 희생자의 유지를 받드는 작업을 한시라도 게을리 한 적이 없었습니다.
재단이 그 출발은 희생자및 그 유가족에 대한 의무책의 일환으로 구사되고 설립된 만큼,본인도,고인과 그 유가족을 위한 일에 정성을 보태고자 5천만원을 출연했습니다.
기금 모금은 경제단체 대표들이 주관해서 대상을 정하고 금액을 할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재단측에서는 한해 50억원정도의 예산을 사용할 셈으로 5백억원 정도의 기금조성 목표를 세웠습니다만,본인은 규모가 너무 커 출연하는 기업에 부담이 될 것 같아 대폭 줄이라는 의견을 낸 바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재단의 사업계획이 확충된데다가 일부 기업인들의 의견이 『계속해서 연간 사업비를 모금할 수도 없고,외부지원을 기대할 수도 없으니 일단 기금을 조성한 다음 본격적인 사업전개 단계에서는 기금증식이자만으로 매년 예산을 충당하는 것으로 하자』고 하며 3차연도 기금모금을 진행시켜 기금의 총액이 처음 구상보다 커지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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