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광주문제 재임중 치유못해 자책/전씨 서면제출 답변내용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광주문제 재임중 치유못해 자책/전씨 서면제출 답변내용

입력
1990.01.01 00:00
0 0

◎미,5ㆍ17 불가피성 긍정적 이해/참모진에 국보위설치 직접 지시/의욕만 앞서서 시행착오… 후회/국민이 내린다면 약사발도 각오○미국정부의 역할

­다음으로는 미 정부의 역할문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광주사태를 전후하여 주한 미대사관을 포함한 미국 정부관리들은 한국의 제반상황에 대하여 우리측과는 어느 정도의 인식차이가 있었다고 보며 이러한 차이는 북한의 도발 가능성에 대해 제3자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예민해 있는 우리의 현실로 보아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최근에 미 국무부가 보내온 광주사태에 대한 석명서를 보면 당시의 한국안보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었던 것처럼 묘사가 되어 있으나 이는 당시 미 정부가 광주사태를 계기로 취한 일련의 군사ㆍ외교적 조치들과는 모순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해 5월22일 미 국무부는 『불안한 사태가 계속되어 폭력사태가 과열된다면 외부세력이 위험한 오판을 할 위험성이 있다』고 북한의 도발책동을 우려하며 『한국사태를 방위조약에 따라 강력히 대응할 것』이라고 북한에 대해 경고한 바 있습니다. 또한 같은날 국무장관 주재로 한국사태에 대한 고위정책조정회의를 열어 항공모함을 위시한 기동함대와 조기경보기를 한국에 파견키로 하는 등 북한의 위협에 대비한 일련의 군사적 조치를 취했으며 당시 미 정부는 북한이 남침해 올 경우 미국은 즉각적으로 대응하겠다는 경고를 제3의 외교경로를 통해 북한측에 통보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5월26일을 전후하여 우리나라의 여야 정치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글라이스틴대사는 『광주사태가 오래 계속된다면 배고픈 호랑이같은 북한이 이를 이용할 가능성이 없지 않으며 미국은 5ㆍ17조치의 배경과 불가피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고 본인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미 정부의 입장과 이번의 미 국무성의 석명서에 나타나있는 입장은 상황 및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기본 입장에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국내외 일각에서는 광주사태가 특별한 의도에 의해 촉발되었다는 주장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이는 전적으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이는 누구라도 집권을 위한 치밀한 사전계획을 세웠다면 광주사태와 같은 커다란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오히려 바랐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불행한 사태의 경위가 어떻게 되었든 그 구체적인 책임소재가 누구에게 귀속되건 간에 본인은 당시 정부와 군의 요직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그 책임의 일부를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대통령 재임기간중에는 『상처는 아물기 전에 건드리면 다시 커져 치유가 어려워진다』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이 문제가 남긴 상처를 근원적으로 치유ㆍ해결하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은 반성과 자책을 느끼고 있습니다.

○계엄 전국확대조치

­다음은 80년 5월17일 정부가 전국비상계엄으로 확대조치한 경위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이 조치가 군부 일각의 영향력에 의해 어떤 의도하에 취해진 것이 아닌가. 또 이무렵의 최규하대통령의 중동순방의 연관성여부 등에 대해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79년 10ㆍ26사태의 충격이란 절대권력의 돌연한 붕괴가 가져온 충격이었습니다. 이 충격에서 깨어나는 80년의 봄이 되면서 우리 사회에는 권력과 권위의 공동현상이 확실히 드러났고 거기에 발호하기 시작한 것이 혼란과 무질서였습니다. 빈발하는 학원소요와 노사분규는 그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4월의 사북사태는 며칠 동안이나마 그 지역에 관한 한 국가기능이 정지된 상태에 도달했고 5월 중순에 학원가두소요는 전국 곳곳에 넘쳐 지역계엄령하인데도 치안마비상태에 도달하였습니다. 5월13일에서 15일에 걸쳐 절정을 이루었던 서울소요에서는 3일째 되는 15일 서울역에서 시청광장에 이르는 도심에 대학생을 중심으로 10만의 군중이 집결되었고 경찰과의 충돌과정에서 당시로서는 예가 드물게 경찰차가 방화당하고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1백13명이 부상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같은 혼란을 틈타 각종 범죄가 난무한 것은 물론,외국바이어들이 다투어 철수하고 조업에 지장을 일으키는 등 경제생활 전반에도 심각한 타격을 주게되자 국민들의 불안심리는 절정에 달했습니다.

한편 10ㆍ26 이후 적화통일의 결정적 기회를 노리고 있던 북한은 이 시점이 되면서 대규모 기동훈련,전쟁물자점검,전투태세 강화 등 심상치 않은 동향이 첩보사항으로 파악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국가 존망지추를 당했던 것입니다. 이같은 상황이 일일이 매스컴에 의해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그나마 일반국민의 동요를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같은 위기상황에서는 그 당사자가 누구이든,국가는 국가 스스로의 자위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같은 국가의 자위조치의 당연한 귀결이 비상계엄의 전국확대였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지역비상계엄에서는 국방장관이 계엄업무를 지휘감독하고 전국비상계엄하에서는 대통령이 직접 지휘감독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전국비상계엄 확대의 문제는 특정지역에 소요나 문제가 있다 없다의 기준을 넘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위에서 설명한 위기상황에 처하여 5월15일 신현확총리는 시위사태에 대한 우려와 함께 자제를 촉구하는 특별담화를 발표했고,그때에 진행중이던 제2차 석유파동 속에서 원유확보를 위하여 중동을 순방중이던 최규하대통령도 국내사태의 급보를 받고 일정을 하루 앞당겨 5월16일 귀국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최 대통령 귀국 직후,국무총리 내무 국방장관,계엄사령관,그리고 본인 등이 참석한 시국대책회의에서 총리는 국내상황을 종합적으로 보고하였고 주영복국방장관은 이 자리에서 비상시국에 임한 군의 대책마련을 위해 다음날 전국주요지휘관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보고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10ㆍ26 이후 우리 사회의 각부면의 권력과 권위가 퇴화,공동화되는 속에서 군만은 국가기능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로서 사회와 국민의 막연하고도 암묵적인 기대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5월17일 개최된 전국 지휘관회의에 참석한 지휘관들은 당시 사태의 심각성과 이에 대한 획기적 대책의 필요성에 의견을 같이하고 이를 위해 전국비상계엄으로의 확대건의를 결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사회일각에는 학생소요를 옹호하며 전국주요도시에서 대규모 군중궐기집회를 준비중인 세력도 있었고,5월16일에는 55개 대학 총학생회장단이 모여 5월22일을 시한으로 계엄의 즉각해제와 정치일정단축 등의 요구를 내걸고 전면투쟁태세를 굳히는 등,사태는 더욱 악화될 형세였습니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전국비상계엄확대건의안은 결의되었고 국방장관과 계엄사령관은 이를 신현확총리에게 보고하여 동의를 받고 최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재가받았으며 이날 저녁으로 임시국무회의에서 의결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와서 당시 한국의 안보상황에 대해 미국의 인식이 어떻다고 말이 있습니다만 물론 한국의 안보에 대해 한국과 미국이 완전한 인식 일치가 있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 해도 당시 한국의 현존하는 안보위협에 대한 미국측의 인식과 대응의지를 과시하는 일환으로 5월13일과 14일 양일간 한미 합동군사훈련이 실시된 바 있음을 상기하기 바랍니다. 계엄확대를 전후한 5월14일부터 18일에 걸쳐 전국주요시설과 방송국들에 경계경비를 위해 인근병력이 배치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국회가 개회중인데도 의원들의 등원이 저지된 것으로 압니다.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5ㆍ17 비상계엄확대조치가 12ㆍ12를 주도한 이른바 신군부세력의 쿠데타였다는 주장이 있씁니다만 쿠데타가 국권을 탈취하기 위해 어떤 집단이나 개인이 국가를 치는 거사라 한다면 거기에 합당한 현상이 5ㆍ17시점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지적해두고자 합니다. 다만,오늘의 시점에서 5ㆍ17을 본다면 신군부세력이라고 일컬어지는 무인들이 명확하고도 주관적인 의지는 결한 채로 시대적 상황과 국가의 요청에 밀려 멋없는 정치의 수렁으로 말려드는 계기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감회가 있습니다.

○국보위 설치 경위

­다음에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경위,목적,법적 근거 등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특히 광주사태와 국보위설치가 탈권을 목적으로 상호연관하에 계획된 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과 국보위 상임위가 설치됨으로써 정부가 무력화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에 대해 답변드리겠습니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전국비상계엄하에서 대통령의 계엄업무에 대한 지휘감독을 보좌하기 위하여 계엄당국과 행정부간에 긴밀한 업무협조를 가능케하여 조속하게 사회안정기반을 구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대통령 직속하에 한시적인 자문보좌기관으로 설치된 것입니다. 80년 4ㆍ5월의 상황이 얼마나 위기상황이 되고 있었는지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한편으로는 혼란과 비례하여 소위 말하는 『정부의 영이 서지 않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무렵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비상한 상황이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극복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뜻있는 국민이라면 누구나가 헤아릴 수 있는 그런 상황이 되어 있었고,당시 「정부의 영」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국민들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불안해했던 것입니다.

나라를 벼랑으로까지 몰고간 위기상황은 전국비상계엄을 불러왔고,전국비상계엄은,무엇보다도 먼저 위기관리와 난국타개를 위해 정부기능을 보완적으로 강화할 수단을 찾지 않을 수 없었으며,그 결과가 국보위 설치로서 나타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행정부의 기능을 계엄적으로 강화하는 매개역할,이것이 국보위 기능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만일 군으로 구성된 계엄당국에게만 당시의 문제해결이 맡겨졌다면,국가가 그렇게 단기간에 위기탈출을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국보위에는 계엄당국과의 매개역을 위해 군의 전문요원들도 차출되었으나,대부분은 행정부요원,학자 및 각계인사들로 구성되었던 것입니다.

상황이 긴박해지면서 나름대로의 비상대책안이 은연중에 우리 사회 여기저기에 거론되고 있었고,이같은 안들은 합수본부였던 보안사의 정보수렴과정에서 취합되고 있었으며,전국계엄으로 확대되는 것과 동시에 본인은 그동안의 정보보고를 상기하여 대책안의 구체적인 검토를 보안사 참모진에게 지시하였습니다.

그리해서 국보위는 설치되었고,그 책임상 본인이 상임위원장직을 맡았던 것입니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용어가 누구의 착상인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분명치 않습니다. 비상기구의 연구검토 초기에는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발동을 전제하여 기구를 설치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보다 합헌적이고 합법적인 근거를 거쳐야 제대로 작용될 수 있다는 결론에 따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국보위는 정부조직법 제5조와 계엄법 제9조 및 제11조 등에 근거를 두고 조직되었으며 그 설치안은 5월27일 최규하대통령께 보고되었습니다. 같은날 국보위설치령이 국무회의에 제안되어 의결을 거친 후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5월31일 발족되었던 것입니다.

국보위가 발족됨으로써 군은 관련분야인 국방업무와 치안유지에만 전념하게 되었고,계엄업무의 일환으로서 군이 당연히 맡도록 되어있는 행정,사법사무에 대한 기획 조정업무는 국보위가 맡게되어 대통령이 전국계엄을 효과적으로 지도 감독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국보위 설치의 당위성을 인식시키기 위하여 광주사태가 조작되고 유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시각이 있는 모양입니다만,이같은 역사인식이야말로 날조되고 왜곡된 사실에 입각하지 않은 역사인식이요 본말전도도 유만부동입니다. 어떤 유능한 신이 있어서 광주사태의 전말을 연출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계엄확대에 의한 업무추진과정에서 필요에 의해 국보위는 설치되었던 것입니다.

국보위는 대통령이 의장이 되고 국무총리와 외무,내무,국방 등 주요장관 및 계엄관계자들이 위원이었습니다. 상임위에는 군인도 있었으나 관료 학자 전문가들도 있었습니다.

국보위가 추진한 과외금지조치나 공직사회정화 등 일련의 충격적인 조치는 오늘의 시각으로 보면 납득이 가지않을 수도 있겠지만,그 당시로서는 국민들의 갈채를 받았고,그때의 국가사회가 위기상황을 탈출하고 혼란과 무질서의 늪에서 벗어나는 데는 효과가 있었던 것을 여러분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때는 어지러운 세상이었습니다. 어지러운 세상에는 어지러운 세상에 대응하는 방법이 있고 요즈음처럼 안정된 대응방식이 있게 마련입니다. 안정된 세상의 눈으로 어지러운 세상의 대응방식을 논의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국보위가 비상한 상황에서 의욕이 앞선 나머지 때로 무리한 수단을 동원하여 물의를 빚은 점은 아쉽고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1980년 8월 최규하대통령이 하야하게 된 진정한 동기가 무엇이냐 라는 질문이 있습니다만 본인으로서는 최 대통령께서 하야하시면서 발표하신 성명의 내용에 비추어 헤아려볼 수 있을 뿐,그 이상의 다른 동기가 있었는지에 관해 저의 주관대로 추측해서 말씀드리기는 어렵다는 점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 제가 행한 바 생각한 바 책임져야할 일들에 관하여 솔직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더러는 십년 전에 있었던 일로 기억이 희미해진 부분도 없지 않고 자료의 부족 때문도 있어서 기대에 어긋난 점이 적지 않을 것으로 압니다. 통치권에 부수된 비밀과 저 개인이 아닌 대통령직에 따르는 권위를 위해,명백하게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도 했습니다.

이밖에도 미진한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약 8년 동안에 걸친 통치권행위 전반을 소상하게 설명한다는 것은 수십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불가능한 노릇입니다. 지금 당장 제반사건을 들추어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바림직스럽겠지만 그렇게하다간 모처럼의 마무리작업이 문제의 시발점이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마저 없지 않습니다. 외람됨을 무릅쓰고 말씀드리면 세계역사상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정권에 대해서도 단시일내에 그 시시비비를 말쑥히 가려낸 예가 없는 것으로 압니다. 부득이 역사의 심판에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일을 등한히 해서도 안되고 지난일도 중요하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이며 내일입니다. 지난 과오도 억울한데 그것에 얽매여 오늘과 내일의 일을 그르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께서 따지실 일이 있으면 저에게 숙제로서 과해주십시요. 회상록이 될지 다른 형식이 될지는 모르나 시간을 들여서 소상하게 구체적으로 제5공화국에 관한 일체의 진실을 밝혀 국민 여러분의 궁금증을 풀어드리겠습니다.

저는 백담사에서 일년 넘어 기도와 정진의 생활을 하며 <자기의 옳음을 주장하기 위해 남을 그르다고 하면 시시비비는 종결될 수 없으니 탓하기 전에 자기를 돌아볼줄 알아야 한다> 는 진리를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저를 용서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알고 한 일이건 모르고 한 일이건 제가 맡고 있던 그 시대의 일은 전적으로 최고책임자인 저의 책임입니다. 도의적 정치적 사법적 모든 책임을 저에게 물어주십시오. 국민이 내리시는 것이라면 죽음의 약사발도 받을 각오입니다. 제가 태어난 조국을 위하는 한알의 보리알이 되기 위해서 조국의 땅에서 죽겠습니다. 나의 이 마음은 결단코 변할 수가 없습니다. 외국에 나가라는 권유를 받기도 하고 그렇게 하라는 압력도 있었습니다. 나는 단호히 거절하였습니다.

평생을 바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쓰신 국부적인 존재였던 이승만박사가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이국의 땅에서 생을 마치게 된 슬픈 사연을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박정희대통령은 우리나라를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게 한 분입니다. 그런데도 국민의 뜻을 저버리고 장기집권을 시도하다가 심복중의 심복이며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사람에게 시해 당하는 처참한 불행을 겪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악순환을 이 나라에서 근절해야겠다고 각오하고 그것이 바로 이 나라에 민주주의를 심는 바탕이 될 것이라고 마음을 다졌습니다. 그런 까닭에 저는 집권 7년반 동안 많은 나날을 저의 임무를 무사히 끝내고 연희동 정든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고대하며 보냈습니다. 때로는 그러한 제 진심을 믿어주지 않는 불신풍조를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또 후진국의 대통령이면 예외없이 해외에 재산을 빼돌려놓고 여차하면 외국으로 나가서 흥청망청 살 것이란 통념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저 스스로 청와대에서 걸어서 나가겠다는 약속을 믿게하는데 7년반이란 세월이 걸렸습니다. 어떻게해야 제 마음 속에 간직된 말들을 국민 여러분의 마음으로 전달할 수 있을 것인지 저의 무능이 답답할 뿐입니다.

저는 지난 80년 대통령이 되기 얼마 전까지도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충직한 한사람의 군인으로서 부과된 책임을 다하겠다는 마음 이외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한 제가 숙명이었던지,어려움에 쌓여있는 나라를 졸지에 맡게 되었습니다. 걱정과 책임감에 짓눌려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는 힘없는 힘을 다쏟아 휴일도 없이 뛰고 또 뛰었습니다.

그리곤 결국 적막하기 짝이 없는 백담사에 만신창이의 몸을 의탁하게 되었습니다. 백담사에서 잠못이루는 수많은 밤에 지난 일을 돌이켜 보고 또 돌이켜 보았습니다. 경험도 준비도 없이 전연 새로운 사태를 당하고 게다가 의욕만이 앞서고 보니 시행착오가 많았고 따라서 후회스런 일들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박 대통령의 시해사건은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거니와 그 유신체제를 비판적으로 승계하는 일이 또한 전례가 없었던 일입니다.

제가 국정을 맡아 있었던 7년 동안에 국민소득이 두배로 늘었다든가 악성인플레를 잡아 흑자경제를 이룩했다든가,외채를 순조롭게 갚아 국제적으로 나라의 신용을 높였다든가,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을 만큼 국력을 배양하고 그 올림픽을 통해 국위를 세계만방에 펼칠 수 있었다든가 하는 사례를 들어 저의 허물을 덮어달라는 것은 결단코 아닙니다. 그러한 업적은 모두 국민 여러분의 합쳐진 위대한 힘이 이룩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의 잘못에 대해 가혹한 매질을 가하시더라도 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은 영예로운 일에 제가 여러분과 함께 동참한 일꾼의 하나로 여겨주셨으면 하는 간절한 희망만은 버릴 수가 없습니다.

중국에 있었다고 하는 옛이야기 하나가 생각납니다. 마을의 동장이 물이 잘 소통되도록,그리고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 마을앞 도랑을 자기집 머슴들과 함께 깨끗이 치웠더니 마을사람들이 『당신이 미꾸라지를 다 잡아먹기 위해 도랑을 친 것이 아니냐?』고 비난하고 나서더란 것입니다. 하도 억울해서 동장은 그날밤 권속들을 데리고 도망을 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에겐 이제 도망칠 곳도 없습니다. 이미 저는 지난해에 저를 감옥에 보내서라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대통령에게 저의 분명한 뜻을 전한 바 있습니다만 「5공청산」을 위해서라면 감옥에라도 가겠습니다.

다만 저는 대한민국의 전직대통령으로서 자기의 잘못을 스스로 책임질줄 아는,염치를 아는 창피하지 않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을 뿐입니다.

국민 여러분이 내리시는 것이라면 죽음의 약사발도 달게 받겠습니다. 이런 비장한 각오로 오늘 새벽 백담사로부터 눈덮인 길을 달려와 지금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제5공화국에 대한 책임은 일체 저에게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건의한 정책이건,어느 부처에서 집행한 조치이건 대통령책임제하에서는 당연히 대통령의 책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든 책임은 저에게 물으시고 희망찬 90년대의 새해를 청량한 기분으로 맞이하시며 조국의 선진화를 성취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가 과거문제에 매달려 있는 동안에도 세계는 쉼없이 변하고 발전해 왔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많은 희생과 노력 끝에 <승천하는 용> 이라는 찬사를 받던 우리 경제가,지금은 비틀거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 부녀자들이 마음놓고 길을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치안상태도 어렵다고 듣고 있습니다.

국내외적으로 직면해 있는 이처럼 어려운 일들은,국민 모두가 뜻과 힘을 합쳐야만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