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길바닥 걸림돌, 애도의 디딤돌이 되다

알림

길바닥 걸림돌, 애도의 디딤돌이 되다

입력
2016.03.11 14:32
0 0
군터 뎀니히가 1997년 독일 쾰른에서 시작한 걸림돌 사업. 나치 피해자들의 이름을 황동판에 새겨 보도블럭에 까는 이 퍼포먼스는 이제 전 유럽이 함께 한다. 살림터 제공
군터 뎀니히가 1997년 독일 쾰른에서 시작한 걸림돌 사업. 나치 피해자들의 이름을 황동판에 새겨 보도블럭에 까는 이 퍼포먼스는 이제 전 유럽이 함께 한다. 살림터 제공

애도의 푸닥거리는 죽은 자를 위해서기도 하지만, 산 자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죽은 자에게 충실한 것은 내가 올바르게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억울함을 풀어주자는 것은 도덕적 대의명분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야 하는 나와 우리의 생존전략이기도 하다.

그래서 제대로 된 추모에 실패했을 때, 우리는 끙끙 앓게 된다. 자크 데리다의 어법을 빌린 인류학자 권헌익의 표현대로 “추모의 시간을 잃어버린 정치적 유령”이 배회하기 때문이다. 유령의 배회를 느끼는 우리는 우울증에 빠져든다. 지금 우리 사회의 풍경들이 우울하게 보인다면, 그건 우리가 죽은 자들에게 충실치 못했기 때문이다. 오해하지 말길. 유령들이 정치화되는 건 유령이 나빠서가 아니라 애도와 추모의 기회를 빼앗겼기 때문이니까.

인기 드라마 tvN의 ‘시그널’이 시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미제 사건이란 충분히 애도하지 못한 죽음이다. 김은희 작가도 미제 사건을 소재로 택한 이유로 “치유되지 않은 시대의 슬픔을 위로하고 싶었다”(한국일보 3월 11일자 22면)고 밝혔다. 뜨거웠던 현대사의 여러 장면들을 젖혀 두고서라도 ‘세월호 참사’가 대표적이다.

‘걸림돌’은 우리 시대의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 참고해 볼만한 흥미로운 사례를 절제된 필치로 힘있게 그려내고 있는 책이다. 1997년 군터 뎀니히라는 독일 예술가는 쾰른에서 독특한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나치 시대 피해자들의 이름과 생몰 연월일을 새긴 황동판을 피해자 마지막 거주지에다 박아 넣는 ‘걸림돌’ 사업이다.

걸림돌을 들어보이는 군터 뎀니히. 날씨가 어쨌건, 그는 웃옷을 벗고 모자를 쓴 채 작업한다. 챙이 넒은 모자를 고집하는 것은 우리의 김삿갓을 떠올리게 한다. 살림터 제공
걸림돌을 들어보이는 군터 뎀니히. 날씨가 어쨌건, 그는 웃옷을 벗고 모자를 쓴 채 작업한다. 챙이 넒은 모자를 고집하는 것은 우리의 김삿갓을 떠올리게 한다. 살림터 제공

뎀니히가 처음 이 일을 시작한 이유는 1970년 좌파 총리 빌리 브란트가 폴란드에서 무릎을 꿇고 1985년 우파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츠체커가 “독일인의 집단 책임”을 선언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찜찜해서다. 나치 시대 일을 기억하느냐고 물으면 독일인 대다수는 아직도 말을 흐린다. 꺼내놓는 건 “공습 당한 밤들, 피난, 추방, 궁핍” 같은 얘기들이다. 자녀들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 아니라 독일 사람들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만 들을 뿐이다.

브란트 총리와 바이츠체커 대통령으로 상징되는 공식적 기억은 교외에 조성된 넓다란 지역의 대규모 기념시설이 담당한다. 영원한 기억을 다짐하는 대형 조각물과 화려한 건축물이 지어지지만, 이렇게 기억이 정전화된다는 건 곧 박제화를 뜻한다. 그보다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심에서 걷다가 발이 한번 툭 걸리면 어떻겠냐는 것이다. 걸림돌이 “공식적인 발언과 개인적 침묵 사이에서 발생한 괴리”를 메워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제안이다. “정치적 유령들”에게 지금의 우리들이 정식 초대장을 보내도록 하자는 것이다.

희생자의 생애를 추적하고 생존해 있는 가족, 친지, 친구들에게 초청장을 보낸다. 기부금도 모으고 전단도 만든다. 걸림돌을 파 넣는 날엔 그들 삶에 대한 간략한 소개, 위로곡 연주, 헌화, 짧은 묵념이 이어진다. 이 과정을 통해 지금 현재의 사람들은 “역사 속에 사라진 피상적인 희생자가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을 만나게 된다.

도시 골목마다 걸림돌 작업을 하고 있는 군터 뎀니히. 살림터 제공
도시 골목마다 걸림돌 작업을 하고 있는 군터 뎀니히. 살림터 제공

희생자는 유대인만이 아니다. 양심범, 집시, 동성애자, 여호와의 증인 신자 등 다양한 소수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저자는 걸림돌에 이름이 새겨진 유령들을 한 명씩 불러낸다. 히틀러 암살 작전에 관여하고 교황에게 반나치를 호소하다 죽어간 지역 언론인, 해외 유명 대학들이 교수직을 보장하면서 탈출을 종용했으나 끝내 국내에 남아 반나치 활동을 벌이다 수용소에서 3일만에 구타당해 죽은 지식인,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소리 소문 없이 숙청당하고 종전 이후에도 줄곧 희생자 명단에서 빠진 나이트클럽 가수 등 다양한 인물 군상들이 나온다. 유골을 강에 쏟아버리거나, 수용소에서 한꺼번에 몰살당하는 바람에 ‘실종’으로 분류된 사람도 부지기수다.

독일 쾰른 지역 가톨릭 지도자이자 언론인으로 히틀러 암살 작전에도 관여했던 니콜라우스 그로스. 나치가 신의 뜻에 어긋난다는 양심에 따라 행동했건먼 교황청은 끝내 그로스를 외면했다. 시신은 소각됐고, 재는 어디에 뿌려진 지 모른다. 살림터 제공
독일 쾰른 지역 가톨릭 지도자이자 언론인으로 히틀러 암살 작전에도 관여했던 니콜라우스 그로스. 나치가 신의 뜻에 어긋난다는 양심에 따라 행동했건먼 교황청은 끝내 그로스를 외면했다. 시신은 소각됐고, 재는 어디에 뿌려진 지 모른다. 살림터 제공

당연히 이런저런 반발도 있었다. 걸림돌을 몰래 뽑아내거나 돌에 새겨진 글귀를 알아볼 수 없도록 페인트나 타르 칠을 해버리는 이들, 극우단체 테러가 두렵다며 걸림돌을 빼달라는 주민들, 집 값이 떨어진다고 소송 내는 변호사, 이래저래 이어지는 살해 협박 전화…. 관료주의도 빠질 수 없다. 세무청은 걸림돌 제작이 대규모니까 예술작품에 적용되는 7%가 아니라 대량생산품에 적용되는 19%의 부가세율을 적용하겠다 나섰다. 결정타도 있었다. 독일 내 유대인들을 대표하는 공동체모임에서 걸림돌이란 형식이 “다시금 짓밟히는 느낌이 든다”는 반대의견을 내기도 했다. “들여다보기 위해 허리를 숙이니 인사하는 셈”이라 겨우 설명하긴 했지만.

독일 쾰른 지역에서 '틸라, 익살맞은 여인'이란 이름으로 활동한 여장 남자 가수 요헨 벨슈는 소리소문 없이 살해됐다. 살림터 제공
독일 쾰른 지역에서 '틸라, 익살맞은 여인'이란 이름으로 활동한 여장 남자 가수 요헨 벨슈는 소리소문 없이 살해됐다. 살림터 제공

그럼에도 이 운동은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 처음엔 뎀니히가 자기 돈을 들여 직접 작업해야 했으나, 지금은 후원금과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이 보태졌다. 10년만인 2007년에는 247번째 도시로 레겐스부르크에 걸림돌이 놓이기 시작했다. 2013년에는 프랑스에서 허가를 받았고 이어 스위스, 룩셈부르크 등 유럽 각지로 뻗어나가고 있다. 지난해 6월 기준 유럽 18개국에 5만3,000개의 걸림돌이 깔렸다.

과거는 그냥 뽑아서 치워버려야 할 미래 발전의 걸림돌이 아니다. 발에 채이면 문득 한 번은 들여다 보게 하는 걸림돌은 오히려 디딤돌이다. 우리 현대사의 숱한 죽음들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당장 세월호의 아이들부터.

조태성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