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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타가 나의 추억을 짓밟았다" 오재원 17년 응원한 '찐팬'의 절규

2024.04.27 09:30
두산 베어스의 프로야구 선수 오재원은 17년 동안 김윤지(35)씨의 우상이었다. 오재원이 2007년 두산에 입단한 후 다른 팀으로 옮기지 않은 것처럼, 윤지씨도 오로지 오재원을 위한 '찐팬'을 자처했다. 오재원이 선수 초창기 대수비나 대주자를 전전할 때부터, 그의 뒤엔 항상 윤지씨가 있었다. 오재원이 점차 자리를 잡으며 주전을 꿰차자 뿌듯한 마음도 들었다. 음료수 등 간식에 선수들 이름을 하나하나 붙여 돌리는 정성도 보였다. 등번호와 오재원의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과 기념품 등 굿즈도 없어선 안될 보물이었다. 그런 윤지씨를 보며 한심한 듯 혀를 차던 그의 친구들마저, 오재원의 팬으로 끌어들일 정도였다. 2022년 10월 8일 오재원이 은퇴하던 날에도 윤지씨는 경기장에 있었다.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아 현장에 갈 수밖에 없었단다. 오재원을 응원했던 그동안의 세월이 머리를 스쳐갔다. 2008년 4월 29일 9회말 2아웃 대타로 나와 아웃 당하던 날, 2011년 4월 5일 목동야구장에서의 첫 홈런,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 선발되던 날, 2015년 프리미어12 일본과의 준결승에서 안타를 친 뒤 환호하는 모습까지. 윤지씨에겐 오재원의 모든 순간들이 마치 자신의 순간인 것처럼 감동적이었다. 그랬던 윤지씨에게, 오재원의 마약류 투약 소식은 크나큰 충격이었다. 처음에 마약류 의혹이 나왔을 때까진 설마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혐의가 뚜렷해지자 데뷔 때부터 응원해 온 시간이 모두 공허해졌다. 신고자에게 보복협박까지 했다는 것, 후배 선수들에게 대리 처방까지 강요했다는 얘기를 듣자 분노가 치밀었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커진 상황에서 자신을 아껴준 팬들에 대해 아무런 사과나 유감의 표현조차 없었다는 것엔 큰 배신감까지 느꼈다. "제 20대가 모두 부정당했어요. 친구들은 손해배상청구라도 해야 된다 하더라고요. 진심으로 오재원이 잘 되길 바랐는데, 너무 큰 상처를 받았어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오재원은 17일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보복협박, 특수재물손괴, 마약류관리법 위반(향정), 사기, 국민건강보험법 및 주민등록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범행을 위해 두산 베어스 등 선수 8명을 동원한 혐의도 받는다. 이들 대부분이 2군 선수들인데, 오재원을 위해 수면제 등을 대리처방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오재원의 잘못된 선택이 팬과 동료 야구인들에게 남긴 민폐는 컸다. 두산 시절 팀 동료였던 LG트윈스 김현수는 "지위를 이용한 수면제 대리처방 강요는 반인륜적"이라며 오재원을 비판했고, 소속팀 선수가 대거 연루된 이승엽 두산베어스 감독은 "나를 비롯한 야구계 선배들의 잘못이고, 후배를 볼 면목이 없다"고 고개를 숙였다. 스포츠 스타의 범죄나 일탈행위는 그 자신과 소속팀에게 큰 피해를 남기지만, 윤지씨 사례에서 보듯 스타를 믿고 따랐던 '팬심'에까지 큰 상처를 남겨, 해당 종목이나 스포츠 전반을 떠받치던 기반 자체를 뒤흔드는 악재로 작용한다. 그럼에도 야구계에선 형사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 메이저리거로 승승장구하던 강정호는 2014년 음주운전으로 그라운드를 떠났고, 장정석 전 KIA 타이거스 단장은 소속팀 박동원(현 LG트윈스)에게 2억 원을 요구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김종국 전 KIA 감독 역시 후원사로부터 선수 유니폼 광고 계약과 관련해 6,000만 원과 부정 청탁을 받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전 삼성라이온즈 투수 윤성환은 5억 원을 받고 승부조작을 시도한 혐의로 징역 10개월의 실형을 선고 받기도 했다. 불명예 은퇴를 하기까지 삼성에서만 135승을 기록한 데다 4연속 우승 등 왕조시절을 이끈 주역이었던 만큼 팬들의 충격도 컸다. 삼성라이온즈 팬 한성철(33)씨는 "윤성환을 좋아해 샀던 유니폼은 버린 지 오래"라며 "수년이 지났지만 좋아했던 선수의 범죄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이런 문제는 야구 뿐만이 아니다. 국가대표이자 K리그 스타였던 최성국의 승부조작 가담 의혹이 있었고, 농구계의 전설 강동희 전 원주동부 감독은 브로커에게 수천만 원을 받고 주전 선수를 빼는 등 승부조작을 했다 구속되기도 했다. 스포츠 스타들이 팬들의 사랑 덕분에 누리는 부와 명예를 당연하게 받아먹기만 할 뿐, 이에 따르는 책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는 매서운 비판도 잇따른다. 축구팬 강민수(34)씨는 "운동 선수들은 자신들이 사랑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며 "팬들의 사랑은 당연한 것이 아니며, 범죄는 팬들의 추억을 짓밟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홍덕기 경상대 체육교육과 교수도 "일부 스포츠 스타들은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측면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며 "국민들의 인권 감수성은 이미 높아졌으니, 선수들의 윤리의식을 높이는 교육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대학생 김레아(26)는 평소 여자친구를 이런 말로 협박하며 붙잡으려고 했다. 여자친구에게 강한 집착 증세를 보이며, 말로 협박을 일삼거나 자주 폭력을 행사했다. 말다툼을 하던 중 휴대폰을 던져버리거나 주먹으로 때리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불안한 상황이 계속되던 중, 지난달 25일 김레아가 결국 사고를 치고 만다. 그는 경기 화성시의 한 오피스텔에서 여자친구를 흉기로 살해했고, 딸에게 행사한 폭력행위를 항의하려고 온 여자친구 어머니에게까지 칼을 휘둘러 중상을 입혔다. 김레아 사건이 끝은 아니다. 최근 연인이나 전 연인을 상대로 한 보복 살인이 잇따른다. 이달 1일 경남 거제시에선 남성 A(20)씨가 헤어진 여자친구를 찾아가 폭행해 숨지게 한 사건이 터졌다. 두 건 모두 평소에 잦은 데이트 폭력 사건이 있었고, 살해 이전에 여러 전조증상들이 보였음에도, 경찰 등이 김레아나 A씨의 범행을 선제적으로 막을 방법은 없었다. 특히 A씨의 경우 2022년부터 이 사건까지 이미 총 12건의 데이트 폭력 관련 신고(쌍방폭행 포함)가 있었음에도, 가해자와 피해자의 분리조치 등이 이뤄지지 않았다. 단순 폭력사건으로 간주되는 데이트 폭력 범죄는 스토킹 범죄나 가정 폭력과 달리 피해자 보호를 위한 별도 가이드라인이 없는데, 이 때문에 경찰이 적극적인 대응에 나서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26일 경찰청에 따르면, 데이트 폭력 신고 건수는 2019년 5만581건에서 지난해 7만7,150건으로 4년 만에 52.5% 급증했다. 증가 배경에 대해 배상훈 프로파일러는 "코로나 이후 인적 네트워크가 축소되며 인간관계를 의존적·폭력적으로 쌓는 이들이 많아졌다"며 "강박과 집착 성향을 드러내는 이들이 데이트 폭력 범죄를 모방해 더욱 확산하는 중"이라고 분석했다. 심하면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는 데이트 폭력에 대한 경찰 대응은 미온적이다. 데이트 폭력 피해자가 경찰에 도움을 요청해도 "둘이서 원만히 해결하라"며 사건을 현장에서 종결시키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한국여성의전화에 접수된 관련 상담은 1,797건이었는데 이중 경찰에 의한 2차피해가 413건으로 23.0%에 달했다. 경찰이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말만 반복하며 수사에 적극적으로 착수하지 않았음을 토로하는 내용이 많았다. 김수정 여성인권상담소장은 "신고해봤자 소용없다며 합의를 종용하는 경찰관으로 인해, 피해자들이 어쩔 수 없이 처벌불원 의사를 밝히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거제 사건에서도 경찰의 사전 조치는 미흡했다. 사건 이전에 있었던 11건의 신고를 분석해 보니, 경찰은 피해자가 처벌 불원 의사를 밝혔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사건을 현장에서 종결했다. 지난해 7월쯤 피해자에게 스마트워치를 한차례 지급했으나 이 역시 피해자 반납으로 한 달 뒤 회수됐다. 결국 A씨는 헤어진 여자친구가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피해자의 원룸을 무단 침입해 얼굴과 머리 등을 주먹으로 수차례 때렸고, 피해자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상태가 악화돼 10일 숨졌다. 가정폭력·스토킹 범죄와 달리, 경찰이 데이트 폭력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려운 구조적 요인은 분명히 있다. 스토킹처벌법의 경우 피해자 보호를 규정하고 있어 경찰 직권으로 접근금지 조치가 가능하고 지난해 7월 반의사불벌죄도 폐지됐지만, 데이트 폭력 범죄엔 이와 같은 별도 규정이 없다.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데이트 폭력의 특성상 피해자가 처벌 의사를 밝히기 쉽지 않다는 점이 간과된 것이다. 피해자가 심리적 지배를 받거나 보복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 탓에 처벌 불원의사를 밝히는 경우가 많은데, 경찰 입장에선 이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범죄 전문가들은 현장에서 상황을 처리하는 경찰의 초동 조치가 좀 더 세밀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공정식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경찰이) 초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면 피해자가 계속 폭력을 수용하게 되어 결국 사망에까지 이를 수 있다"며 초기 대응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곽준호 법무법인 청 변호사는 "현행법을 바꾸지 않는 상황에선 결국 경찰이 적극적으로 따져서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