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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홀로 귀촌 여성들에 “기술은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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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홀로 귀촌 여성들에 “기술은 필수”

입력
2016.10.05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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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삶을 찾아 농촌으로 이주하는 여성들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지만 귀농·귀촌 교육은 여전히 남성중심적이다. 여자 혼자서도 거뜬한 농촌생활을 위해 전북 완주에서 열린 생활기술 캠프에서 참가자들이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완주=김혜경 프리랜서기자 salutkyeong@gmail.com
새로운 삶을 찾아 농촌으로 이주하는 여성들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지만 귀농·귀촌 교육은 여전히 남성중심적이다. 여자 혼자서도 거뜬한 농촌생활을 위해 전북 완주에서 열린 생활기술 캠프에서 참가자들이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완주=김혜경 프리랜서기자 salutkyeong@gmail.com

“거기 스카프 조심하세요! 같이 썰릴 수 있거든요. 톱질할 때는 옷차림도 중요하다는 걸 잊지 마세요.”

2일 전북 완주 로컬에너지센터 작업장. 귀촌 4년차 우혜정(40)씨가 어설픈 솜씨로 톱질 중인 젊은 여성들에게 목청을 높인다. 투박한 톱과 하늘하늘한 스카프라니, 상상해 본 적은 없지만 실제로 보니 꽤 괜찮은 조합이다. 여기에 이국적 패턴의 다홍색 치마, 가을 향기 물씬 나는 자수 카디건에 스키니진까지. 귀촌ㆍ귀농을 준비하는 초보 여자 목수들의 패션은 오색찬란 다채롭다.

이날 강사로 나선 우씨는 서울서 10년 넘게 직장생활을 하다 우연히 목공을 접하면서 흥미와 재능을 발견하고 그 길로 전향했다. 현재 완주에서 친구들과 문화공간 ‘제리스튜됴’를 운영 중인데, 스튜디오 내의 싱크대와 테이블, 선반 등 실내 구조물은 모조리 그의 손을 거쳤다. “운전을 할 줄 알면 포크레인 다루는 것도 어렵지만은 않아요.” 우씨의 말에 일제히 터져 나오는 탄성. 이어 “혼자 사시는 할머니들을 위해 방풍공사 봉사를 다닌다”고 하니 다들 할 말을 잃은 표정이다. 요즘 말로 ‘걸크러쉬’가 따로 없다. 완주 일대에서 1~3일 열린 ‘여성을 위한 생활기술 캠프’의 풍경이다.

완주숙녀회가 1~3일 진행한 귀농·귀촌 여성을 위한 생활기술 캠프에서 한 참여자가 목재를 톱질하고 있다. 완주=김혜경 프리랜서기자 salutkyeong@gmail.com
완주숙녀회가 1~3일 진행한 귀농·귀촌 여성을 위한 생활기술 캠프에서 한 참여자가 목재를 톱질하고 있다. 완주=김혜경 프리랜서기자 salutkyeong@gmail.com

귀촌, 여자들이 많이 한다는데

이번 행사의 주최는 ‘전환기술사회적협동조합’이지만, 실제로 프로그램을 짜고 실행한 것은 이름만 들어도 유쾌한 ‘완주숙녀회(줄여 완숙회)’라는 단체다. 완주 토박이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완주로 귀촌한 여성들로 구성된 모임으로, 적정기술 생활기술 등을 배우면서, 느슨하지만 함께 어울리며 재미있게 살아보자는 모토를 갖고 있다. 이 중 전환기술사회적협동조합에 재직하는 이보현, 이지정씨를 주축으로 캠프가 탄생했다.

2박 3일 진행된 캠프에는 모두 12명이 모였다. 모두 귀촌을 했거나 준비 중이거나 연구하고 있는 여성들이다. 주로 비혼인 참가자들은 귀촌에 성공한 두 비혼 여성을 만나는 것을 시작으로, 기본적인 목공 전기 배관 실습을 거쳐, 성평등 문화 구축에 성공한 영국의 생태마을공동체 사례를 듣는 일정을 소화했다. 밤마다 벌어지는 수다파티와 모닥불에 둘러앉아 고구마를 구워먹는 낭만은 덤이었다.

지난해 귀농ㆍ귀촌 인구는 각각 1만 2,114명과 46만 6,778명. 급격한 산업화와 함께 도시로 몰리던 한국인들이 다시 농촌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은 IMF 직후부터였다. 그때는 농사로 생계를 도모하려던 귀농이 활발했다. 최근에는 도시에서의 경쟁과 소비 위주의 삶에서 벗어나 자연주의 생활을 향유하려는 귀촌 인구가 매년 폭증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중장년 남성 혹은 부부 위주이던 귀농ㆍ귀촌 인구도 청년과 여성, 1인가구 등으로 다양해지고 있다. 실제로 귀촌한 여성은 2013년 19만 7,341명, 2014년 21만4,807명, 2015년 22만1,744명으로 꾸준히 늘었다.

귀농ㆍ귀촌 인구 중 비혼 비율은 아직 정확하게 집계된 바 없지만, 계속 증가할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삼선복지재단이 발표한 ‘농촌으로 이주하는 청년층의 현실과 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귀농(귀촌 희망자 112명 중 21명(18.8%)이 결혼하지 않았거나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답했다. 또 설문 대상이 된 38명의 여성 귀농ㆍ귀촌자 중 비혼은 19명으로 50%나 됐다. 보고서는 “귀농ㆍ귀촌 청년 중 비혼자의 전체 비율, 특히 여성 비혼자의 비중이 계속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농촌에서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여성에게도 드릴과 몽키스패너가 필수품이다. 완주=김혜경 프리랜서기자 salutkyeong@gmail.com
농촌에서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여성에게도 드릴과 몽키스패너가 필수품이다. 완주=김혜경 프리랜서기자 salutkyeong@gmail.com

트렌드가 이렇게 변하고 있는데도 귀농ㆍ귀촌 교육은 여전히 중장년 남성 중심에 머물러 있다. 올해 농림축산식품부가 귀농교육을 위해 선정한 교육기관은 전국 33개(38개 과정), 민간기관까지 더하면 그 과정은 60여개에 육박한다. 하지만 귀촌을 준비하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교육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곳은 사실상 한 곳도 없다는 게 완숙회의 설명이다. “강사도 남자, 참여자도 남자, 여자들은 훈수를 두거나 가엾게 바라보는 아저씨들 틈바구니에서 공구 한번 제대로 만져보기 어렵죠.” 이보현씨는 “여자를 위한 기술교육 요구는 많은데 도무지 찾을 수 없어 아예 직접 만들기로 했다”고 말했다.

참가자 가운데는 귀농교육을 여러 차례 받은 사람이 많았다. 다양한 커리큘럼을 접해보려는 의도도 있겠지만, 정작 필요한 정보를 얻지 못해 이곳 저곳을 전전한 측면도 있다. 도시농부학교(10주), 생태귀농학교(4박 5일), 소농학교(8개월), 잡초라도 충분한 풀학교(12주) 등 다양한 귀농 관련 수업을 들은 장혜정(39)씨도 그랬다. “지난 3년 동안 농사기술을 배웠고, 잡초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어요. 하지만 여자 혼자 시골에서 사는 게 어떤 건지, 무슨 준비가 필요할 지 가르쳐주는 곳은 없었어요.” 장씨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곳곳에서 참가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귀촌한 여성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가부장적인 농촌 문화라고 캠프 참여자들은 입을 모았다. 완주=김혜경 프리랜서기자 salutkyeong@gmail.com
귀촌한 여성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가부장적인 농촌 문화라고 캠프 참여자들은 입을 모았다. 완주=김혜경 프리랜서기자 salutkyeong@gmail.com

가부장적 문화, 여자에게 기술은 필수

그렇다면 귀촌하려는 여성들에게 왜 하필 기술교육일까. 농사기술도 아니고 왜 적정기술이어야 했을까. 캠프 멘토와 이미 귀촌한 일부 참가자들은 “농촌에서 기술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입을 모은다. 농촌에는 아파트처럼 관리인이 상주하지 않으며, 출장서비스도 도시처럼 흔하지 않다. 더구나 귀촌인이 살게 되는 집들은 새로 짓지 않는 이상, 대개 낡거나 빈 채로 오래 방치된 집이라 시도 때도 없이 곳곳에 탈이 난다. 생존과 직결되는 보일러나 수도는 특히 고장이 잦다. 긴급하게 수리를 요하지만 전문 업체를 부르자니 어마어마한 출장비가 걸리고, 이웃에 부탁하자니 그것도 만만치 않다. 농촌은 여전히 가부장적 문화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산간지방인 전북 남원 산내면으로 귀촌한 지 4년 됐다는 참가자 권명심(40)씨는 “아직도 가부장적인 문화가 단단하게 버티고 있는 농촌에서 미래에 하게 될지도 모를 부탁 때문에 평소 남자 이웃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것은 고역”이라고 말했다. 권씨는 또 “(치안 공백이 큰)시골에서 여자 혼자 있는 집에 남자를 들일 때의 심리적 불안감은 도시와 비교할 수 없이 크다”면서 최근 가스 교체를 하려다 얼큰하게 취한 상태로 집안에 들어온 기사가 룸살롱 운운하는 통에 두려움에 떨어야 했던 지인의 사례를 소개했다. 그는 이 참에 기본적인 기술을 제대로 배워 나눌 생각으로 동네 여자 대표격으로 캠프에 참여했다.

완숙회 관계자들은 귀촌 당사자인 데다 사전에 전국 귀촌ㆍ귀농 여성을 인터뷰한 경험이 있어 이러한 문제점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농사기술이 아닌 ‘생존기술’에 가까운 교육을 계획했다. 이것이 모든 여성이 필요로 하지만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여성을 위한 적정기술 캠프가 됐다. 완숙회 이지정씨는 “일반적인 적정기술의 개념으로 보자면 규모가 작고, 손쉬운 재료를 사용하며, 그 방법이 쉽다는 점에서 여성과 잘 맞는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귀촌한 여성들에게 목공 기술은 단순히 기술을 넘어 자신감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완주=김혜경 프리랜서기자 salutkyeong@gmail.com
귀촌한 여성들에게 목공 기술은 단순히 기술을 넘어 자신감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완주=김혜경 프리랜서기자 salutkyeong@gmail.com

자립ㆍ평등 함께 잘 살기 위하여

이날 참가자들은 꽉 막힌 세면대를 뚫고, 누전 원인을 추적하며, 수도 배관을 새로 냈다가 막는 법 등을 익혔다. 연장을 들고 직접 작업에 뛰어들고 나니 “이제 비싼 돈 들여 사람 부를 일이 줄겠다”며 다들 기뻐하는 눈치다. 그러나 가장 큰 성과는 “해보니 어렵지 않다”는 자신감을 얻은 것이다. 일찍이 “나는 전 부치기보다 보일러 고치기가 즐겁다”는 것을 깨달은 ‘숙녀’들도 존재했다. 반대로 캠프의 청일점으로, 전기 배관 강의를 맡은 심부건(47) 에너지협동조합 이사는 “지금까지 아내가 통사정한 뒤에야 무언가를 고쳐주고는 했는데, 이 자리를 통해 얼마나 답답했을지 이해하게 됐다”며 “남자가 설거지하고 요리하는 게 점차 보편화하는 것처럼 여자도 기술 영역의 일을 함께 하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가히 ‘젠더스와프(Gender Swap, 전통적 개념의 성 역할을 바꾸는 것)’가 대한민국 농촌에 상륙하는 순간이라 할 만하다.

몽키스패너, 드라이버 등 캠프에 참여한 여성들이 사용한 각종 도구들. 완주=김혜경 프리랜서기자 salutkyeong@gmail.com
몽키스패너, 드라이버 등 캠프에 참여한 여성들이 사용한 각종 도구들. 완주=김혜경 프리랜서기자 salutkyeong@gmail.com

완숙회는 참가자들의 뜨거운 호응에 따라 귀촌하려는 여성을 위한 교육을 지속적으로 열 계획이다. 이런 움직임이 바깥으로 더욱 확장해 가기를 바라는 마음도 크다. 그렇다고 아마조네스를 꿈꾸는 것은 아니다. 다른 귀농(귀촌 교육이 여성들에게 남성과 동등한 기회를 제공할 때까지 여성전용교육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일 뿐이다. 내용적 평등을 실현하고자 소수자에게 ‘적극적 우대조치’를 시행하는 것과 비슷한 접근이다. 영국 생태마을공동체 대안기술센터(CAT)의 건축가 신디 해리스도 “30년 전 ‘여자 건축가’가 아니라 ‘건축가’를 찾는다는 광고를 봤더라면 지원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여성의 활동이 제한 받는 사회에서 적극적인 우대 조치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모두가 기술을 익히자는 게 아니라 최종적으로는 각자 잘하는 것을 담백하게 돕고 나누기를 바라는 거예요. 자기가 무얼 잘하는지 알려면 이것저것 해봐야 하고, 기술도 그 중 하나인 거죠.”(이보현씨)

사실 완숙회가 환기한 ‘생존기술’에 가까운 적정기술은 도시에서도 유용하다. 여자들이여, 이제 몽키스패너를 들자. 그리고 네이버와 유튜브를 두드리자. 기술은 농촌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여자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선사한다. 오죽하면 25년 전 ‘몽키스패너를 잡으면 세상살이가 더욱 빛나 보일 것입니다’라는 책이 나왔을까. 물론 책 내용은 이 기사와 전혀 관계 없지만.

완주=김혜경 프리랜서기자 salutkyeong@gmail.com

농촌여성문화모임 ‘문화기획달’이 만든 잡지 ‘농촌 성문화 다시보기’에 실린 만화 ‘짝짓기’.
농촌여성문화모임 ‘문화기획달’이 만든 잡지 ‘농촌 성문화 다시보기’에 실린 만화 ‘짝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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