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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이아이피’ 박훈정 “젠더 감수성 더 고민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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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이아이피’ 박훈정 “젠더 감수성 더 고민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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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08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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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브이아이피’를 연출한 박훈정 감독은 “관객의 달라진 감수성을 반영하면서도 창작자로서 자기 검열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것이 향후 과제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제공
영화 ‘브이아이피’를 연출한 박훈정 감독은 “관객의 달라진 감수성을 반영하면서도 창작자로서 자기 검열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것이 향후 과제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제공

박훈정 감독은 범죄 누아르 외길 인생이다. 누아르 영화를 특별히 좋아하고, 누아르 영화만 만든다. 각본을 쓴 ‘악마를 보았다’와 ‘부당거래’(2010), 연출 데뷔작 ‘혈투’(2011) 그리고 인장 같은 작품인 ‘신세계’(2013)까지, 이야기는 다 달라도, 심지어 ‘혈투’는 사극인데도, 궁극적으로 누아르라는 하나의 실로 꿰어진다. 점점 획일화되는 충무로에서 이렇게 자기 색을 또렷하게 견지하는 감독은 의외로 드물다.

영화 ‘브이아이피’도 당연히 누아르다. 일제강점기 마지막 호랑이 사냥꾼의 비애를 그린 영화 ‘대호’(2015)에서 청소년 관람가로 잠시 ‘외도’를 했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최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마주한 박 감독은 “개인 성향 자체가 대중적이지 않은데 관객층이 넓은 ‘대호’를 만들면서 고충이 컸다”며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소설로 쓰기 시작한 작품이 ‘브이아이피’였다”고 말했다.

소설은 영화화됐다. 챕터식 구성은 소설이 영화에 남긴 흔적이다. 마치 책장을 넘기듯 챕터마다 사건이 전환점을 맞는다.

이야기의 중심엔 기획 귀순한 북한 고위급 자제 김광일(이종석)의 연쇄살인 행각이 있다. 김광일을 보호하려는 국가정보원 요원 박재혁(장동건)과 미국중앙정보국(CIA) 요원 폴(피터 스토메어), 반대로 김광일을 잡아들이려는 경찰 채이도(김명민)와, 복수심을 품은 북한 보안성 요원 리대범(박희순) 등이 서로 물고 물리며 국가 권력 기관의 역학관계를 펼쳐낸다. 남자들의 우정과 배신을 뜨끈하게 그렸던 ‘신세계’와 달리 ‘브이아이피’는 사건을 쫓는다. 감정이 배제돼 차갑고 건조하다.

“마치 모래알을 씹듯이 서걱서걱한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색감을 싹 걷어내 무채색에 가까운 이미지를 담았죠. 주인공들도 감정에 얽매이지 않아요. 인물 중심으로 영화를 보는 우리 관객의 정서엔 낯설지 않겠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누아르를 다르게 변주해 보고 싶었습니다.”

기획 귀순이란 소재가 색다르다. 씁쓸하지만, 박 감독 말마따나 “분단국가 한국에서나 시도 가능한 소재”다. 박 감독은 오래 전 근현대사 관련 책에서 본, 북한 거물급 인사의 귀순 장면을 머릿속에 담아뒀다가 이번에 꺼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의 딜레마를 그리기에 좋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해 “우리 사회 시스템의 부조리”로 귀결되는 이야기가 완성됐다.

“어쨌든 우리에겐 어떤 믿음 같은 게 있잖아요. 거대한 사회적 시스템이 우리를 지켜줄 거라는 믿음. 그런데 어떤 괴물 같은 놈이 시스템에 난입한 뒤로 정치적 입장들이 충돌하면서 시스템이 오작동을 하게 됩니다. 괴물은 태어나기도 하지만 사회가 키우기도 하죠. 그 시스템에 종속된 인물들이 겪는 딜레마를 통해 사회 부조리를 드러내려고 했습니다.”

영화 ‘브이아이피’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제공
영화 ‘브이아이피’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제공

살기 어린 이종석, 다혈질 김명민, 서늘한 장동건 등 배우들의 연기 변신도 흥미롭다. 박 감독의 과감한 캐스팅이 아니었으면 못 만났을 얼굴이다. 그는 “인물들의 전사가 설명되지 않기에 억지 설정이나 무리수를 두지 않으려 했다”며 “기존 이미지를 조금씩 비틀면 새로움이 보인다”고 말했다.

누아르 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가장 큰 고민은 아마도 범죄 묘사의 방법과 수위일 것이다. ‘브이아이피’도 표현 수위가 높은 편이다. 여성 대상 범죄가 등장해 불편해하는 시선도 존재한다. 박 감독은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문제 제기”라며 겸허하게 비판을 받아들였다.

“실제로 여성 대상 범죄의 비율이 높기 때문에 영화적 소재로 더 주목할 수밖에 없어요. 다만 표현 방식에 대해선 더 고민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브이아이피’를 찍을 때 고민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김광일의 사이코패스 얼굴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여자뿐 아니라 남자도 힘들어하는 장면이었죠. 그런데 제 생각 이상으로 여성 관객들이 크게 반응하더라고요. 저의 젠더 감수성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이번 논란을 겪으며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무지했다는 걸 깨닫게 됐어요. 앞으로 더 신중해야 할 것 같습니다.”

‘브이아이피’를 내놓자마자 박 감독은 새 영화 작업에 착수했다. 이번엔 여자 캐릭터가 주인공이다. 배우 조민수, 최우식, 김다미 등이 출연하는 ‘마녀’다. 박 감독의 성찰이 영화에 어떻게 담길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마녀’는 딱 한 단어에서 시작되는 이야깁니다. 전복! 실험적인 영화가 될 겁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박훈정 감독은 “‘신세계’ 속편을 어떤 이야기와 어떤 형식으로 꾸릴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제공
박훈정 감독은 “‘신세계’ 속편을 어떤 이야기와 어떤 형식으로 꾸릴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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