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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나에게 총을 주오

입력
2015.09.01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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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과수원이 온통 붉은 빛이다. 올해 날씨가 좋았던 덕에 과일마다 당도가 높아서 몇 년 만에 국내 과일 소비가 늘었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린다. 나도 요즘 대표적인 가을 사과인 홍로라는 품종의 수확을 시작하는 참이다. 신 맛이 없이 단 맛이 강하고 진한 붉은 색이어서 보통 추석 차례 상에 오르는 대표적인 사과 품종이다. 역시 올해가 제일 맛도 좋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인 새벽 다섯 시 반, 나는 매일 이 시간에 과수원으로 간다. 내가 발걸음 소리조차 죽여 가며 어두운 과수원으로 가는 이유는 하나, 무기라도 되는 양 두 손에 든 꽹과리(일종의 대용품인 숟가락과 헌 냄비)를 두드리기 위해서다. 과수원 중간쯤에 이르러 나는 있는 힘껏 그것을 두드려댄다. 이 무슨 해괴한 짓일까 하겠지만, 그리고 그 효과를 장담할 순 없지만 이 꽹과리치기는 새들을 쫓기 위함이다.

새들의 식성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빨간 사과를 즐겨 먹는 놈들의 종류가 상당하다는 것이다. 물론 제철 과일이니까 새들의 주식일 리는 없고 후식이거나 별미로 먹는 것이리라. 부리로 콕 찍어 먹는 놈이 있는가 하면 상당한 깊이로 움푹 파먹는 놈들도 있다. 어느 쪽이든 새가 입을 댄 순간 그 사과는 폐기된다. 농민 입장에서는 아깝고 억울하기 짝이 없다. 일 년 내내 농사를 지은 게 결코 새들의 후식을 위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나도 새 피해가 극심했던 어느 해에는 거의 수백만원 어치에 달하는 사과를 놈들에게 강탈(?) 당하기도 했다.

조금 다행인 것은 새들에게도 어떤 규칙이 있는지(저희끼리 조약을 맺지는 않았겠지만) 해마다 피해를 보는 지역이 바뀐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지역을 집중적으로 공격해서 아예 초토화 시키지는 않는다. 올해는 평균보다 약간 하회하는 정도로 우리 과수원을 먹잇감으로 삼은 듯하다. 그래도 하루에 수십 개 정도의 피해를 낳고 있는 중이다. 돈으로 치면 얼마 안 될지 몰라도 수확 직전인 크고 빨간 사과에 흠집이 나면 아까운 걸 넘어서 새들에 대해 일종의 분노까지 치민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새를 주제로 많은 시를 썼던 박남수 시인의 시를 좋아하여 여러 편을 암송하기도 했다. 그러던 내가 기어이 총까지 마련한 것은 예의 피해가 극심했던 3년 전의 가을이었다.

별별 수단을 다 써보았지만 날마다 공습하듯 덮치는 새떼들을 막을 길이 없었다. 허수아비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고 급기야 새가 싫어하는 냄새를 풍긴다는 나프탈렌 수백 개를 나무마다 걸었다가 사람이 먼저 질식할 뻔한 적도 있었다. 거의 처절할 정도로 새들과 싸우고 있을 때 이웃이 조언한 게 총으로 놈들을 사살해보라는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새들이 워낙 영악해져서 실제로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아야 뜸해진다는 거였다. 급한 마음에 앞뒤 따지지 않고 총포사로 달려가 공기총 한 정을 구입하게 되었다.

농민들에게는 유해조수 퇴치라는 명목으로 쉽게 총기 허가가 나고 연중 집에 보관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나는 단 한 마리의 새에게도 총을 쏘지 못했다. 총에는 조준을 위한 망원경이 달려 있는데 성능이 뛰어나서 아주 가깝게 새가 보인다. 동그랗게 뜬 새의 눈을 마주한 순간, 내가 결코 거기에 대고 방아쇠를 당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허공에 대고 공포를 쏘기만 해도 새들이 꽤 줄어드는 듯했다. 작년에는 공포만으로도 피해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올해는 총이 없다. 지난봄에 엽총을 이용한 살인 사건이 연이어 터지는 바람에 애꿎은 농민들의 공기총까지 모두 경찰서에 영치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그러더니 한창 수확철인 지금까지도 도무지 총을 내어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새벽 꽹과리를 치며 요구하느니, 내게 총을 다오!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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