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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선 기자

등록 : 2017.12.29 04:40
수정 : 2017.12.29 11:42

"여자 이전에 사람이다"... 모던걸을 돌아보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신여성 도착하다'

등록 : 2017.12.29 04:40
수정 : 2017.12.29 11:42

나혜석 '자화상'(1928ㆍ추정)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이 2년간 준비해 21일 개막한 기획전 ‘신여성 도착하다’. 전시를 기획한 강승완 학예연구실장은 “잘못 읽으면 ‘신여성도 착하다’가 된다”고 했다.

뼈 있는 농담이다. 여성은 늘 ‘착함’을 강요 받으니까. 전시는 근대 한국 여성이 겪은 그 억압을 까발린다. 당당한 주체적 존재를 꿈꿨으나 ‘나쁜 여자’가 되고 만 개화기, 일제강점기 신여성의 도전과 좌절을 고증한다. 회화, 조각, 사진, 잡지, 영화, 기록물을 비롯한 500여점을 통해서다.

전시 1부 ‘신여성 언파레-드(On parade)’는 주류 기득권이 신여성을 묘사한 방식을 보여준다. 국어사전은 신여성을 ‘개화기 때 신식 교육을 받은 여자, 서양식 차림새를 한 여자’로 정의한다. 당시 ‘신식 교육’은 자아 실현이 아닌 현모양처 자질 습득 목적이어야 했고, ‘서양식 차림새’는 신여성을 요즘 말로 ‘김치녀’로 놀리는 이유가 됐다. 사치스럽게 꾸미고 한가롭게 시간을 때우는 여성은 잡지 표지화 속 ‘모던걸’의 클리셰였다. “그 찻집 아가씨는 곰보딱지, 그래도 마음만은 비단 같아. 나만 보면 생긋생긋 어쩔 줄 모른답니다요.”(유행가 ‘찻집아가씨’ㆍ1938) 여성 비하 가사의 역사는 그렇게 길다. 조선미술대전 최고상을 받은 이유태의 회화 ‘인물일대: 탐구’(1944년)는 이질적이다. 서울대병원 실험실에 앉아 있는 ‘전문직 여성’을 그렸다. 한복 위에 흰 가운이라는 옷차림은 전통과 근대화, 동양과 서양, 가부장제와 해방이라는 여러 겹의 억압과 모순을 상징한다.

안석주가 그린 잡지 '신여성'(개벽사ㆍ1933년 9월) 표지.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2부 ‘내가 그림이요 그림이 내가 되어’에선 미술계가 홀대한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인다. 나혜석의 ‘자화상’(1928), 천경자의 ‘조부’(1943), 정찬영의 ‘공작’(1937), 박래현의 ‘예술해부괘도(1) 전신골격’(1940) 등이다. 나상윤의 ‘누드’(1927) 속 여인의 가슴은 납작하고 배는 불룩 튀어나왔다. 욕망의 대상이기에 늘 완벽해야 하는 몸이 아닌, 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몸이다. 전시가 당시 기생을 재조명한 부분도 흥미롭다. ‘장한’ 등 기생 잡지를 발간해 공창제 폐지를 비롯한 노동 권익을 주장했고, ‘여성의 미래’인 여학생들을 지원했다. 조선시대 마지막 어진 화가 김은호가 춤추는 기생들을 그린 명작 ‘미인승무도’(1922)는 국내 최초 공개된다. 미국 플로리다대학이 소장한 작품이다.

‘그녀가 그들의 운명이다’고 이름 붙인 3부에선 나혜석(미술) 김명순(문학) 최승희(무용) 이난영(음악) 주세죽(사회운동) 등 여성 선각자 5명의 삶을 돌아본다. 객사, 숙청, 이혼, 정신병원 감금 등 이들의 삶은 대개 비참하게 끝났다. 사회적으로 제거되는 게 당시 튀는 여성의 숙명이었다. “남편의 아내 되기 전에 / 자녀의 어미 되기 전에 / (나는) 첫째로 사람이라네 / 아아, 소녀들이여 깨어서 뒤를 따라오라”(잡지 ‘신여성’에 발표한 시 ‘노라’)고 외친 나혜석의 자화상에 슬픔이 깃들어 있는 이유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는 전시는 내년 4월 1일까지다.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이유태 '인물일대-탐구’(1944)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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