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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상고법원은 답이 아니다

입력
2015.05.19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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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은 최근 상고법원 설치법안의 국회통과를 위해 부심하고 있다. 이 법안의 목적은 대법원 산하에 설치될 상고법원을 통해 연 3만 건이 넘는 상고사건 대부분을 처리하게 함으로써 사건 당사자들의 사법 만족도를 높이는 한편, 대법원으로 하여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들에 대한 재판 등 최고법원 본연의 역할에 역량을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고법원 설치안은 하급심의 과중한 부담에 따른 심리 부실이라는 사법불신의 뿌리를 잘라내기 위한 근본적 대책이 아니라 대법원 내지 대법관의 권위 확보에 치중하고 있는 안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고 본다.

우리 사회가 고도로 분업화된 산업사회를 넘어 정보사회로 급속히 이행함에 따라 법원이 해결해야 하는 분쟁들도 복잡성ㆍ전문성을 더해 가면서 법관에게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요구하고 있다. 게다가 2013년 지방법원 법관 1인당 사건 수가 723건에 달하는 실정이다. 이처럼 재판의 부담이 질적ㆍ양적으로 가중되고 있는 상황에서 하급심이 엄밀한 증거조사를 거쳐 당사자들이 주장하는 사실의 진위를 정확히 가려 재판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여기에 사법불신의 뿌리가 있다. 부실한 재판을 경험한 국민이 상소를 불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사법불신을 근원적으로 해소하려면 일제시대 이래 유지되어 온 효율성에 방점이 찍혀 있는, 소수의 엘리트 법관에 의한 재판주의와 결별하는 수밖에 없다. 경험 많은 중견법관의 하급심 배치도 미봉책에 불과하다. 그도 인식능력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 이상 법관 증원 및 법정 증설에 따르는 비용을 구실로 사법에 대한 신뢰라는 소중한 가치가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사법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유능한 국가, 신뢰받는 국가를 만드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재판에 대한 불신은 사법부에 대한 불신을 넘어 법과 국가의 정당성에 대한 회의를 품게 만들고, 온전히 기능하는 정당한 법질서 위에서 자라나는 사회적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도 함께 증발시켜 버린다. 그러므로 국회나 정부도 이 문제를 국가 전체 차원의 문제로서 인식하고 그 근본적 해결에 협조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인구 약 8,000만인 독일의 법관 수는 우리의 10배다. 독일은 신중하고 정확한 재판을 위해 방대한 사법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독일은 이를 통해 사법부는 물론 ‘법’과 ‘국가’에 대한 두터운 신뢰라는 값진 사회적 자본을 축적하고, 이를 통해 사회를 합리화하고 그 바탕 위에서 국민경제의 건실한 성장도 견인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의 예는 법의 정의로운 관철에 필요한 충분한 사법조직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국가가 지불해야 한다는 것, 또 그것이 결코 낭비가 아님을 말해 준다.

한편, 대법관이 대폭 증원될 경우에도 대법원이 법령해석 및 판례의 통일성 그리고 그 현실적합성을 확보ㆍ검증하는 법률심으로서의 기능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대규모의 최고법원을 두는 나라에서 배울 수 있다.

대법원의 주장처럼 상고법원의 설치를 통해 대법원의 부담이 현저하게 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급심에서부터 형성되는 사법불신을 해소시키는 것도 국민의 사법비용을 절감시켜 주는 것도 아니다. 또 상고법원을 통해 대법원이 누리게 될 고양된 권위와 안락은, 대법원장을 정점으로 한 일극적 인사체계에서 법관 계급의 세분화에 따른 법관 관료화의 심화와 그로 인한 하급심 재판의 실질적 독립성 약화와 신뢰성 저하, 하급심 강화를 위한 대법원의 적극적 노력의 지체라는 대가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법관의 획기적 증원 등 하급심 충실화를 통해 사건 해결의 입구에서부터 신뢰받을 수 있는 재판을 가능하게 하는 데 사법 정책의 초점을 맞추는 한편, 당분간 대법관의 수를 늘려 상고사건의 폭증에 대처함으로써 전통적 3심제 구조를 유지하는 것이 더 공익에 부합하는 길이다.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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