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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육대 도시락’으로 본 소통의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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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육대 도시락’으로 본 소통의 진화

입력
2016.02.10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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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실내체육관에 난데없이 '도시락 전쟁'이 벌어졌다. 지난달 18일 진행된 MBC '아이돌 스타 육상 씨름 풋살 양궁 선수권 대회'(이하 아육대) 녹화현장. 점심시간이 되자 준비한 도시락을 팬들에게 나눠주는 아이돌 가수의 손이 분주했다. 남성 그룹 비투비의 팬 김희영(32·가명)씨는 현장에서 비투비에게 피자를 받아 한끼를 때웠다. 김씨는 "'역조공'을 받으면 그동안 '하늘의 별'처럼 느껴지던 연예인도 동네 친구가 된 듯 가깝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역조공'은 주로 선물을 받는 입장이었던 연예인이 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선물하는 행위를 뜻하는 신조어다. '조공'은 종속국이 종주국에 예물을 바치는 일을 뜻하지만, 연예계에서는 팬들이 연예인에게 선물을 하는 일이라는 일상적인 의미로 쓰인다.

최근 역조공이 일반화되면서 연예인의 즉흥 이벤트를 넘어 소속사가 기획하고 마케팅에 활용하는 사례가 빈번해졌다. 팬미팅과 같은 공식 행사에서 가벼운 선물은 당연한 식순이 됐고 1대 1 식사, 데이트 등 다양한 형식의 이벤트까지 생기고 있다. 역조공은 어쩌다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을까.

배우 이정재는 지난해 9월 '잘생김'이라는 별명을 지어준 팬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씨제스 엔터테인먼트
배우 이정재는 지난해 9월 '잘생김'이라는 별명을 지어준 팬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씨제스 엔터테인먼트

1. 식사 대접부터 데이트까지…역조공의 진화

역조공이란 개념이 없던 시절에도 팬 사랑이 남다른 연예인은 있었다. 배우 하지원은 2009년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직후 팬들에게 식사 대접을 약속했다. 다음해 그는 팬미팅 자리에서 100여명의 팬들과 식사를 함께 해 약속을 지켰다. 2011년에는 자신의 집을 찾아온 외국인 팬을 집 안으로 초대해 다과를 대접하기도 했다.

가수 아이유는 '역조공의 아이콘'으로 불릴 정도다. 그는 매년 돌아오는 데뷔일, 컴백일 등 기념일마다 고기파티를 열고 직접 준비한 선물을 전한다. 2011년 데뷔 3주년 행사에서 그는 자신의 키스마크가 새겨진 메모지, 자필편지, 열쇠고리, 버스카드 등 50명분의 선물을 전달했다. 4주년엔 각각 다른 셀카 폴라로이드 사진과 자작곡CD 등을, 5주년엔 카드지갑과 손편지 등을 준비했다.

2000년대 후반이 되면서 역조공 아이템은 더 기발해졌다. 배우 이정재는 2014년 '잘생김' 별명을 지어준 팬을 만나 식사를 대접했다. 이 팬은 영화 '관상' 900만 돌파 기념 행사에서 이정재에게 "얼굴에 김 묻었다. 잘생김"이라고 농담을 던졌다가 인터넷상에서 화제가 된 바 있다. 이후 이정재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잘생김' 별명을 지어준 팬에게 식사 대접을 하고 싶다"며 회사로 연락을 부탁해 만남이 성사됐다. 한 팬의 소소한 장난이 이례적인 역조공으로 이어진 것.

남성그룹 보이프렌드는 종종 멤버가 팬들의 남자친구로 변신한다. 커플링을 나눠끼거나 놀이동산, 심야영화관 데이트를 하는 식이다. 멤버들과 스티커 사진을 찍고 놀이기구도 타면서 팬들의 덕심('덕후'와 '팬심'의 합성어)은 더욱 끈끈해진다.

이 외에도 남성그룹 소년공화국은 2014년 멤버들이 치킨집 알바생이 돼 팬에게 치킨을 서빙하는 이벤트를 진행했다. 남성그룹 BAP는 2013년 유니세프를 통해 팬덤 이름으로 아프리카에 수동식 펌프를 기증했다. 역조공의 방식이 가수의 즉흥적인 선물 공세에서 소속사 측이 기획하는 마케팅 이벤트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걸그룹 에이핑크는 공식 페이스북에 최근 역조공한 도시락 인증샷을 남겼다. 에이큐브 공식 페이스북
걸그룹 에이핑크는 공식 페이스북에 최근 역조공한 도시락 인증샷을 남겼다. 에이큐브 공식 페이스북

2. '아육대' 역조공, 총정리 게시물까지 등장

매년 돌아오는 '아육대' 녹화일 현장은 그야말로 '역조공의 메카'가 된다. 새벽부터 10시간 이상 녹화가 진행되다 보니, 가수의 입장에서는 하루 종일 자리를 지키는 팬들을 챙기지 않을 수 없다. 걸그룹 여자친구는 이번 녹화에서 점심식사로 패밀리레스토랑 도시락을, 저녁식사로 치킨을 나눠줘 팬들 사이에 화제가 됐다. 걸그룹 걸스데이는 멤버 혜리가 모델로 활동하는 브랜드의 도시락을 준비했다. 걸그룹 트와이스와 오마이걸, 다이아 등은 직접 쓴 손편지로 여운을 남겼다.

정성을 들인 도시락 선물은 팬들의 손을 거쳐 실시간으로 온라인에 공개된다. 지난해부터 각 팀 별로 어떤 역조공을 펼쳤는지 총정리한 게시물도 등장했다. 도시락 종류, 손편지 유무, 소속사 측에서 따로 제작한 도시락 라벨의 멘트까지 확인할 수 있다.

'아육대'에 이 같은 역조공 문화가 생긴 건 불과 2~3년 사이의 일이다. 2013년 한 팀 씩 챙기기 시작한 것이 올해는 안 챙기면 무성의하게 보이는 수준까지 돼버렸다. 연예인이 이처럼 역조공에 열을 올리게 된 이유가 뭘까. 한 유명 연예기획사 관계자는 연예계 팬덤 문화의 진화가 팬서비스 방식까지 바꿨다고 분석했다. 그는 "팬들이 공개방송이나 출근길, 공항길을 따라다니며 활동하는 문화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며 "연예인과 팬이 직접 접촉할 기회가 많다. 이전보다 적극적인 소통과 팬서비스가 통하는 시대"라고 전했다. 화장실도 팬들 몰래 다녔던 남성그룹 HOT의 신비주의 전략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동방신기를 좋아하는 직장인 이지은(27·가명)씨는 "역조공 선물을 보면 쿠키, 담요, 도시락 등 대부분 소소한 것들이다. 팬들은 물질적인 선물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를 통해 얻는 연예인과의 교감을 기대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포화 상태인 연예계 시장에서 팬심이 다른 연예인에게로 이동하는 현상, 이른바 '철새 팬'이 많아진다는 점도 역조공 열풍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이 관계자는 "연예계 시장에서 소비자에게 선택의 기회가 많아지면서 팬서비스의 중요성도 날로 높아지고 있다"며 "다만 팬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게 기본 취지이기 때문에 역조공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큰 부담을 느끼고 있지는 않다"고 전했다.

이소라기자 wtnsora2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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