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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오우삼이 바로 내 문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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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오우삼이 바로 내 문하생"

입력
2015.12.0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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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화 감독은 "디지털 시대 젊은 세대가 호응할 수 있는 액션영화를 마지막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정창화 감독 제공
정창화 감독은 "디지털 시대 젊은 세대가 호응할 수 있는 액션영화를 마지막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정창화 감독 제공

‘죽음의 다섯 손가락’(1972)은 홍콩영화사에 돋을새김된 액션영화다. 홍콩영화 최초로 북미 시장 주말 흥행순위 1위에 오르며 홍콩영화의 세계화를 알렸다. 영화 악동 쿠엔틴 타란티노의 유명 영화 ‘킬빌’(2003)이 음악 일부와 특정 장면을 이 영화에서 원용해 화제가 됐다. 당대 홍콩영화계를 호령하던 쇼브러더스가 제작한 작품이나 여기엔 한국영화 DNA가 새겨져 있다. 메가폰을 잡은 이가 한국의 정창화(87) 감독이다.

한국보다 해외에서 더 많이 알려진 액션영화의 대가 정 감독은 1954년 ‘최후의 유혹’으로 데뷔한 뒤 ‘장희빈’(1961)과 ‘황혼의 검객’(1967) 등 여러 흥행작을 내고 1967년 쇼브러더스에 스카우트돼 10년 넘게 홍콩에서 활동했다. 정 감독은 최근 그의 영화인생을 돌아본 ‘내 영화 인생은 아직 치열하다’(삶과지식)를 출간했다. 2011년 한국일보에 연재됐던 ‘정창화 감독의 액션영화에 바친 60년’이 토대가 됐다. 지난달 30일 미국에 거주하는 정 감독과 전화인터뷰로 책 출간과 영화 인생에 얽힌 에피소드를 들었다.

정 감독이 홍콩을 활동 근거지로 택한 이유는 요즘 시선에서 봤을 때 다소 의외다. 정 감독은 “당시 사회는 액션영화를 인정조차 하지 않아 마음의 상처가 컸다”고 말했다. “한국은 액션영화 불모지라서 무술감독이 따로 없고 무술인 출신도 아닌 내가 노력하고 공부해서 만들어야 했다. 그럼에도 개척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해 서운했다”는 것. 정 감독은 “홍콩으로 갈 때 좋은 작품 하나를 반드시 만들겠다고 각오했고 ‘죽음의 다섯 손가락’이 나오게 됐다”고 했다. 그는 “류승완 감독이 ‘베테랑’으로 좋은 평가를 받고 청룡영화상 감독상까지 받는 것을 보며 인식의 변화를 절감한다”고 밝혔다.

1973년 쇼브러더스를 떠나 신생 영화사 골든하베스트의 창립 멤버가 된 정 감독은 당시 계약을 통해 한국영화계에선 꿈꾸기 힘든 부를 쌓았다. 정 감독은 “1년에 연출하는 세 작품 중 한 작품의 수입 2%만을 가져가는 계약조건이었는데 79년 한국에 돌아온 뒤 29편의 영화를 다른 곳에 손 벌리지 않고 제작할 수 있을 정도로 큰 돈을 벌었다”고 했다. 그는 “세계 곳곳에 구축된 중국인들의 거대한 극장 네트워크 덕을 봤다”고 말했다.

요절해서 신화가 된 세계적인 액션배우 리샤오룽과는 작품을 같이 할 뻔했다. ‘당산대형’(1971)과 ‘정무문’ 등 단 3편으로 월드스타가 된 리샤오룽은 차기작에 대한 압박감에 시달렸다. ‘자기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이 고갈되었다고 느끼자 슬럼프에 빠지게 되었고 마약을 하기 시작’(190쪽)했다. 같은 골든하베스트 소속이었던 리샤오룽은 정 감독을 찾아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정 감독도 흔쾌히 동의했고 함께 할 영화를 기획하던 중에 리샤오룽은 급사했다. 리샤오룽은 당시 골든하베스트와의 전속 계약이 끝나가고 있었다. 리샤오룽을 둘러싼 홍콩 영화사들의 암투가 죽음으로 이어졌다고 정 감독은 추정한다.

정 감독은 ‘영웅본색’ 시리즈로 유명한 액션영화 명장 우위썬 감독과도 인연이 깊다. “액션영화를 연출하고 싶어하던 우 감독이 조감독 시절 내 촬영장에 자주 찾아왔다”며 “내가 우 감독의 데뷔작 ‘여자태권군영회’(1974)의 한국-홍콩합작을 주선해주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여자태권군영회' 한국 촬영장에서 정창화(오른쪽 네번째) 감독과 우위썬(오른쪽 일곱번째) 감독이 함께 서있다. 정창화 감독 제공
'여자태권군영회' 한국 촬영장에서 정창화(오른쪽 네번째) 감독과 우위썬(오른쪽 일곱번째) 감독이 함께 서있다. 정창화 감독 제공

임권택 감독(‘장군의 아들’ ‘서편제’ 등)과 고 유현목(‘오발탄’) 감독도 정 감독 아래서 조연출을 거쳤다. 촬영기간 어느 민가 절구통에 매일 새벽 잠결에 소변을 봤던 유 감독의 기행, 빨치산에 부역한 부모 때문에 희망을 잃고 매일 술로 지새던 임 감독에게 정 감독이 절주와 독서를 권했던 사연 등이 책에 담겨 있다. 정 감독의 ‘햇빛 쏟아지는 벌판’(1960)으로 데뷔한 일곱 살 여자 아역배우가 훗날 유명 가수 윤복희로 성장했다는 일화도 흥미롭다.

납북과 탈출 사건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신상옥ㆍ최은희 부부가 홍콩에서 실종되기 전 정 감독을 만났던 에피소드도 등장한다. 정 감독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123쪽)이라고 신 감독을 평가한다.

정 감독은 1979년 영화사 화풍흥업을 설립하며 충무로에 돌아왔으나 검열의 벽에 좌절했다. 그는 “국군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 대위가 내 영화사 사무실에 살다시피 했다”며 “자유롭게 만들어도 좋은 작품이 나올까 말까 하는데 10분, 20분을 마구 잘라내던 시절”이라고 돌아봤다. 그는 1996년 한국을 떠나 미국 샌디에이고에 정착했다.

정 감독은 로스앤젤레스한국영화제와 샌디에이고한국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며 한국영화를 알리고 있다. “한국영화 수준이 높아졌다고 하나 미국에서 흥행한 영화가 딱히 없습니다. 영화제를 통해 한국영화를 알리면 관객도 늘지 않을까요?”

라제기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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