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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듦에 마음이 부서지는가, 그와 협력할 때 환희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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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듦에 마음이 부서지는가, 그와 협력할 때 환희를 얻는다

입력
2018.07.27 04:4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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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통한 자들의 정치학'에 이어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를 선보이는 사회운동가이자 작가 파커 J. 파머. 여든의 나이를 바라보는 그는 이제 불굴의 패배를 위해 비행할 준비가 됐다고 말한다. 글항아리 제공
'비통한 자들의 정치학'에 이어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를 선보이는 사회운동가이자 작가 파커 J. 파머. 여든의 나이를 바라보는 그는 이제 불굴의 패배를 위해 비행할 준비가 됐다고 말한다. 글항아리 제공

제목이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On the brink of everything)’다. 여든 다 된 할아버지의 책이니 당연한 얘기 아닐까. 중심일 리가 없을뿐더러, 설사 중심이라 해도 그게 오히려 더 큰 문제가 아닐까.

그런데 이 표현이 의외로 자못 심각한 모양이다. 저자는 이렇게 투덜거려 놨다. “케임브리지 온라인 사전에서 ‘on the brink’를 검색하면 ‘절벽이나 높은 지대의 끝자락, 또는 뭔가 좋거나 나쁜 일이 벌어지려는 시점’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그리고 이런 예문이 딸려 있다. ‘그 회사는 몰락 직전에 있었다.’” 가장자리란, 단순히 중심에서 떨어져 있다는 얘기가 아니라 거대한 몰락, 곧 죽음 앞에 서 있다는 얘기다.

저자의 불만은 여기서 나온다. 용례들이 “왜 이렇게 부정적인 것들뿐인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이렇게 되받아친다.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 있기를 좋아한다. 그것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기 때문이다.” 거대한 몰락이란 추락이기도 하지만, “자유롭게 날아오르기 직전”인 것도 가능하지 않느냐는 되물음이다.

이 비유가 무얼 말하는지, 퍼뜩 떠오르는 책이 있을 것이다. 후대 수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시몬 베이유의 ‘중력과 은총’이다. 2차 세계대전 말 유대인 여성으로 숱한 몰락을 지켜봐야 했던 베이유가 남긴 고통의 기록. 거대한 몰락 앞에서 나를 아래로 떨어뜨릴 중력이 아니라 나를 위로 고양시켜줄 은총을 떠올려보겠다는 의지 말이다. 저자 또한 은총을 믿는다며 대신 그 은총을 가벼움으로 정의한다. “천사들이 날 수 있는 건 스스로를 가볍게 여기기 때문”이란 말도 가져다 놨다.

우리나라 ‘아스팔트 노인들’을 떠올리며 지레 놀랄 필요는 없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불굴의 패배”다. 거대한 몰락 앞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거기서 날아 올라 되돌아오겠다는 노욕 같은 게 아니다. 내려가되 우당탕 굴러 떨어지는 게 아니라 우아하게 날아서 내려가겠다는 것이다. “나이듦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면 거짓으로 보낸 젊은 시절을 넘어 진실을 향해 시들어 갈 기회가 열린다.” ‘패배’ 그리고 ‘시듦’이다.

올해 일흔 아홉이 된 저자 파커 J. 파머는 미국 내 교육운동가로 이름 높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이란 책으로 널리 알려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의원 시절이던 2014년 세월호 단식 농성장을 찾았을 당시 이 책을 들고 있었던 사실이 지난 3월쯤 알려지면서 화제를 모았다.

파커 J. 파머가 지난 3월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포스팅한 글. 2014년 세월호 농성장을 찾은 문재인 의원 앞에 '비통한 자들의 정치학'이 놓여져 있다. 파머가 이 사실을 공개하자 수많은 이들이 박수를 보냈고, 파머는 다시 감사의 뜻을 나타낸 이 포스팅을 남겼다.
파커 J. 파머가 지난 3월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포스팅한 글. 2014년 세월호 농성장을 찾은 문재인 의원 앞에 '비통한 자들의 정치학'이 놓여져 있다. 파머가 이 사실을 공개하자 수많은 이들이 박수를 보냈고, 파머는 다시 감사의 뜻을 나타낸 이 포스팅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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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일흔 아홉 맞은 저자

노인이라는 길 가장자리에 서서

삶의 의미 유머러스하게 담아

제목에 ‘정치학’이 있으니 사회과학책으로 분류됐지만, 사회과학 책으로는 특이하게도 마음에 기초한 접근이 돋보였다. 마음이 부서지고 깨진 비통한 자들에게, 그 부서진 마음을 흩어 내버릴 것(Broken apart)이 아니라 부서진 마음을 활짝 열어젖힐 때(Broken open) 연대와 변화 같은 새로운 발전이 가능하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정치학을 이성과 논리와 경험적 데이터가 아니라 마음과 영성의 문제로 풀어낸, 기발하면서도 독특한 책이었다.

이 책은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보다는 조금 더 발랄하고 가벼운 에세이 모음집이다. 에세이라서가 아니다. 아무래도 이 책은 은총을 바라보기로 한, 스스로 가볍다고 생각하기에 날 수 있는 천사가 되어 보기로 한 책이니까 그렇다. 버클리대학에서 종교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은 일, 애 셋 딸린 가장인 주제에 안정적인 교수직을 포기하고 사회운동가의 길을 택했던 이야기,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의 20세기 버전”이라 불리는 가톨릭 영성주의자 토머스 머튼의 책 ‘칠층산’과의 만남, 그럼에도 가톨릭 대신 퀘이커를 택한 이야기 등이 잔잔한 유머와 함께 전달된다.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파커 J. 파머 지음ㆍ김찬호, 정하린 옮김

글항아리 발행ㆍ280쪽ㆍ1만5,000원

이 책의 기조는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과 같다. 늙는다는 것, 그래서 일 처리도 더디어 지고 뭔가 자꾸 잊어버리고 어설퍼진다는 것 또한 마음이 부서지는 사태다. 나와 아무런 상관없는 일일 것만 같던 죽음이었건만, 이제 그 녀석은 내 발 밑에 서 있는 것만 같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이는 그 자체로 축하할만한 사건”이라는 걸 깨닫는다.

이것 자체가 하나의 깨달음이다. “세상이 나를 즐겁게 할 수 있음을 알 만큼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다. 맙소사. 평생 나를 울리고 괴롭혀왔다고 생각해왔던, 대체 내게 왜 이래 싶었던 이 세상이, 나를 즐겁게 해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는 얘기다. 그렇기에 이제 “내 기대는 세상이 아닌 나 자신을 향해 있다.” 이 즐거운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불굴의 패배’를 할 것인가.

불굴의 패배는 이런 것이다. “결과에 연연하는 한, 우리는 결과가 나오는 점점 더 작은 과업에만 매달리게 될 것이다. 사랑, 진실, 정의 같은 가치들(결코 완전하게 성취되지 않을 가치들)을 따라 살 때는 오직 충실함만이 판단 기준이다.” 거대한 몰락 앞에 서서 가볍게 날아오를 채비를 하고 있는 사람이 건네는 이야기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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