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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도 인터뷰] 김영철 “목구멍에 와인 흐를 때 얼굴엔 눈물 흘렀죠”

입력
2018.03.0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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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철은 삶의 고비를 딱 꼬집어 말하지 않았다. 시련도 극복도 그 뒤의 성취도 한 데 묶어 ‘롤러코스터’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5일 서울 양천구 목동 SBS에서 그를 만났다. 류효진 기자
김영철은 삶의 고비를 딱 꼬집어 말하지 않았다. 시련도 극복도 그 뒤의 성취도 한 데 묶어 ‘롤러코스터’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5일 서울 양천구 목동 SBS에서 그를 만났다. 류효진 기자

2009년 방송사들의 연말 ‘연예대상’ 시상식이 한창일 때 김영철(44)은 TV 속에 없었다. 그 앞에 앉아 절박함과 절망감이 섞인 눈으로 화면을 바라봤다. 와인 한 병을 따놓고서. 목구멍으로 와인을 넘기며 눈물도 흘렸다. “(강)호동이 형이 그러더라고요. ‘그래도 와라! 개그맨들 다 오는 자리 아이가. 뭐, 초대 받아야만 갈 수 있나?’ 그런데 도저히 갈 수가 없었어요.”

받을 상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한 게 없어서”가 이유였다. 그리고 소망했다. ‘아, 나도 저 자리에 박수 치면서 앉아있고 싶다!’ 존재의 의미를 찾지 못한 ‘미생’의 한탄이었다.

그로부터 9년, 그는 스스로도 말하듯 지금 인생의 정점에 서 있다. 그의 이름 석자 앞에 ‘개그맨’이란 수식어만 붙이기가 아쉽다. 예능 프로그램은 제쳐 두고라도, 누구나 탐내는 출근길 라디오 프로그램 DJ에, 세 번째 싱글 앨범을 낸 가수요, 500회 연단에 선 ‘스타 강사’다. 지금까지 낸 책만 (번역서와 공저를 포함해) 여덟 권. ‘영어 잘하는 개그맨’을 넘어 사람들은 이제 그가 지닌 ‘삶의 에너지’를 궁금해한다. 인생의 고비를 넘기고 훨훨 날갯짓을 하고 있는 그는 더 높은 비상을 꿈꾼다. 그의 신곡처럼 “K팝은 되고 왜 K코미디는 ‘안되나용’?”라면서.

9년 간,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철파엠’(SBS라디오 ‘김영철의 파워FM’)을 들으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 사람은 늘 뭐가 그렇게 기껍고 즐거울까?’ 그 기운이 어디서 나오냐는 질문 많이 받지 않나요?

“하하. 맞아요. 그래서 특강에서도 ‘마트에서 샀어요’라고 농담으로 받아 치기도 하죠.”

-긍정 에너지의 원천은 무엇인가요?

“엄마(나이 사십을 넘겼지만 여전히 그는 모친을 이렇게 표현하는 ‘막내 아들’이다)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팔순이신데도 건강한 유머가 저보다 더 충만하세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늘 우리 집은 ‘까르르 집안’이었어요. 엄마 스스로도 ‘내가 너무 속이 없나’ 할 정도예요. 엄마한테 물어본 적이 있어요. ‘엄마는 울어본 적 없나?’ 하고. 그랬더니 ‘와 없겠노. 근데, 너그들 앞에서 굳이 티를 내야 하나’ 하시더라고요. 슬픔을 때로는 감춰야 한다는 걸 엄마한테서 배웠어요.”

-그래도 살면서, 특히나 연예계 활동을 하면서 슬럼프가 없을 수는 없었을 텐데,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언제인가요?

“2009년 연말 방송 3사가 연예대상 시상식을 하는데 저는 못 갔어요. 집에서 와인 한 병 따놓고 TV를 봤어요. 저는 당연히 없었죠. 뭐라도 했어야 가서 앉아있을 수 있을 텐데, 저는 그럴 자격이 없는 것 같았어요. 데뷔한 지 10년, 나이는 30대 후반으로 가고 있고… ‘이제는 나에게 기회가 안 생기려나 보다’ 하는 불안이 엄습하던 때죠. 와인 마시면서 눈물도 몇 번 흘렸을 걸요. 참 힘들었어요.”

-그 때가 첫 슬럼프였나요?

“더 앞서서 한번 더 있었죠. 으레 겪는 ‘신인 슬럼프’. 데뷔한 지 4년 되던 2003년, (한국 나이로) 서른이 되던 해였죠. 저는 서른이 되면 인생이 완전히 달라질 거라고 예상했어요. 삶을 조망하는 시각이 생기고 한층 안정감을 느끼게 될 줄 알았던 거죠.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하춘화 성대모사’로 반짝 인기를 얻었지만 방송은 더 웃긴 것, 더 센 걸 원했죠. 내놓을 게 없으니 불안해졌고 그게 슬럼프가 됐어요.”

-그 두 고비를 어떻게 극복했나요?

“다행히 늘 제 곁에는 선배들이 있었어요. 2003년 (당시 출연했던 KBS ‘개그콘서트’의) 서수민 PD가 뜬금없이 ‘몬트리올 코미디 페스티벌’ 얘기를 꺼내더라고요. 그때 떠났어요. 비행기 직항도 없는 그 곳에. 마치 조선시대 때 사신들이 서양 문물을 배우러 가는 심정이었달까요? 서양인들은 대체 어떻게 웃기는지 보러 간 거죠. 그때 ‘아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여기서도 잘 하면 웃길 수 있겠다’고 생각 했어요. 시야가 넓어지고 담력이 생긴 거죠. 그리고 마음 먹었어요. ‘이 무대에 꼭 서보자’고. 그런데 해결해야 할 문제가 영어였어요.”

-영어를 공부한 계기가 된 건가요?

“맞아요. 게다가 슬럼프를 극복하려면 저는 뭐라도 배워야 했거든요. 그때 영어를 돌파구로 삼았죠. 마침 방송 스케줄이 많지 않아 무료한 시간이 많을 때였어요. 어릴 때부터 지적 허영심이 있어서 배우고 읽기를 좋아한 천성도 한 몫 했죠. 그때 영어학원에 다니기 시작해서 요즘도 라디오 방송 전 새벽에 ‘전화 영어’를 해요.”

영어가 슬럼프를 극복하는 돌파구였다는 김영철씨. 류효진 기자.
영어가 슬럼프를 극복하는 돌파구였다는 김영철씨. 류효진 기자.

그로부터 13년 뒤 그는 진짜, 영어로 사람들을 웃겼다. 호주의 ‘멜버른 코미디 페스티벌’에서다. 세계 3대 코미디 페스티벌 중 하나로 꼽히는 무대다. ‘김영철의 조크 콘서트’라고 이름 붙인 6분 코미디로 꿈을 이뤘다.

-영어를 시작하니 또 무엇이 달라지던가요?

“제 이름 앞에 타이틀이 하나 더 붙었죠. ‘영어 잘 하는’이라는. 영어를 했더니 생각의 범위가 넓어지고 통찰력도 생겼어요. 언어를 하나 더 한다는 건, 그 언어를 쓰는 대륙의 시각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거잖아요.”

-라디오 프로그램도 영어 덕분에 하게 된 것 아닌가요? ‘철파엠’ 전 시간대에 했던 ‘김영철의 펀펀 투데이’요.

“맞아요. ‘펀펀 투데이’ 진행을 맡게 되면서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는 말을 다시 한번 확인했어요. 2011년 SBS라디오 ‘스타특강’에 출연하게 됐는데 당시 제 얘기를 재미있게 보신 방송사 국장님이 ‘영철씨, 프로그램 하나 하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에 제가 바로 ‘국장님! 저 새벽에 1시간이면 되고요. 이름은 김영철의 뻔뻔한 잉글리시 이런 느낌 어때요? 콩트나 팝송 활용해서 하루에 영어 표현 딱 하나씩만 알려주는 거죠’라고 했어요. 그 국장님은 지나가는 말로 하신 말씀일 텐데, 제가 ‘30초 PT(프레젠테이션)’ 수준으로 답을 하니까 ‘그거 괜찮겠네!’라는 반응이 나오더라고요.”

그렇게 새벽 6~7시 라디오 프로그램 DJ를 맡게 된 그는, 5년 뒤엔 황금시간 대인 출근길 방송으로 옮겨 타 지금에 이르렀다. 그것 역시 단련돼있지 않았더라면 오지 않았을 기회다. 그는 그래서 “’운도 실력’이라는 말을 믿는다”고 했다. 다독(多讀)도 내공의 훌륭한 밑거름이 됐다. 라디오는 결국 말이고, 말은 책에서 나오는 법이니까. 그는 인터뷰에서도 종종 자연스럽게 책을 인용했다. 인생을 바꾼 ‘월든’(헨리 데이비드 소로), 30세의 의미를 되짚어 보게 한 ‘삼십세’(잉게보르크 바흐만), 삶의 철학을 키워 준 ‘고민하는 힘’(강상중)이 그것들이다. 2003년에 이어 찾아온 2009년의 슬럼프를 이기게 해준 벗도 책이다.

그는 신문도 ‘일부러’ 본다고 했다. 국내 신문 2개, 여기에 ‘뉴욕타임스’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까지 4개 매체를 구독한다. 방송사에 출근하면 다른 조간들도 훑는다. 철파엠의 ‘뉴스 브리핑’ 코너에서 종종 기자의 말을 맞받아 치거나, 실수를 바로잡는 데서 ‘신문 읽는 김영철’이 엿보인다.

슬럼프를 이기게 해준 또 하나, ‘멘토’들이다. 반드시 해야 할 말이 생각 났다는 듯 그는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저에게는 좋은 선배들이 많았어요. 신동엽, 유재석, 강호동, 박미선, 송은이, 정선희… 이런 선배들이 제 곁에 있는 게 큰 축복이죠. 저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한동안 그는 그들이 자신에게 해줬던 조언들을 읊었다. 누구에게나 멘토는 있게 마련이지만, 그들을 살아있는 스승으로 만드는 건 결국 자기 자신이다. 김영철은 주위의 충고를 허투루 듣지 않고 실천하는 성실함과 부지런함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나는 나 자신의 결핍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채우려 노력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김영철씨는 '결핍'이 자신을 여기까지 이끌었다고 말했다. 류효진 기자
김영철씨는 '결핍'이 자신을 여기까지 이끌었다고 말했다. 류효진 기자

-지금까지 인생을 크게 나눈다면요?

“음, 개그맨 되기 전인 스물 다섯 살까지는 인생의 워밍업 단계였던 것 같아요. 드디어 데뷔한 스물 여섯부터 마흔 둘까지, 그러니까 3년 전까지가 제게는 롤러코스터의 시기였어요.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고. 그리고 지금이 제 인생 최고의 시즌이 아닌가 해요.”

-힘들었던 시기를 딱 꼬집어 말하지 않는 게 특이해요.

“천성 때문인지, 노력을 해서 그런 건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아요. 하하. 고2 때 부모님이 이혼 하시고, 이듬해에 교통사고로 갑작스레 형을 잃었거든요. 10대에 인생의 가장 힘든 일을 겪어서일까요. 데뷔 초기 슬럼프도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삶의 고비들을 잘 넘긴 김영철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이 온 거죠.”

-앞으로 더 이루고 싶은 게 있나요?

“인터내셔널 코미디언이죠! 미국에 진출하는 것.”

-지금이 최고의 시즌이라면서요. 더구나 미국 진출은 쉽지 않은 도전인데요.

“K팝은 있는데, K코미디는 없잖아요? 엄마가 감사하게도 이렇게 개그맨하기 좋은 얼굴을 주셨고, 마침 영어도 하니 못할 것 없죠. (웃음)”

-김영철씨가 생각하는 삶의 도, 삶의 길은 뭔가요?

“(한참 생각한 뒤) 이 시요!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그는 스마트폰으로 시를 찾아 마지막 구절을 내밀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어디에선가/나는 한숨 지으며 이야기할 것입니다/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저는 아직 안 가본 길이 더 많아요. 그 중에 하나가 미국이에요. 힘들겠죠. 실패할 수도 있을 거예요. 가서 해보고 안 되면, 다시 (자신의 유행어로) ‘실패했잖아~’, ‘안됐잖아~’ 하면 되지 않겠어요? 하하. 어느 구름에서 비올 지 모르는 게 인생이니까요.”

그의 말은 틀렸다. 그의 족적이 말하니까. 지금까지 스스로 ‘비 오는 구름’을 만들어 왔다고.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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