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진 기자

정준호 기자

김민정 기자

김진주 기자

등록 : 2014.09.04 04:40
수정 : 2014.09.04 19:11

[까톡2030] 그래서 우린 썸을 탄다

등록 : 2014.09.04 04:40
수정 : 2014.09.04 19:11

직장♂ / 고백? 생각 없어, 설렘과 편안함 같이 느껴서 좋아

직장♀ / 연애? 구속에 밀당에 맨날 속앓이하기 너무 싫어

구직♂ / 여친? 선물 사야지 밥 사야지 주머니 사정 알잖아

구직

♀ / 사랑? 거절했어, 외롭지만 내 한몸 챙기기도 벅차

톡바닥

썸이란

누리꾼들이 편집하는 인터넷백과사전 ‘엔하위키미러’에 따르면 ‘썸’은 ‘내 거인 듯 내 거 아닌 내 거 같은(가요 ‘썸’, 소유ㆍ정기고)’상태다.정식으로 사귀는 관계를 연애로 정의했을 때 그 전 단계다. 남녀 간에 묘한 기류가 흐른다는 ‘썸씽(something)’에서 파생 돼 2009년 이후 널리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흔히 ‘썸타다(관심 가는 이성과 잘돼가다)’ ‘썸남ㆍ썸녀(썸 관계에 있는 상대 남성ㆍ여성)’로 표현된다.

외국계 회사에서 근무 중인 이민호(30ㆍ가명)씨는 올해 4월부터 한 여성 동료와 금요일 저녁, 주말마다 식사를 하고 영화도 보며 알콩달콩 데이트를 하고 있다. 이씨는 그녀와 요즘 유행하는 말로 ‘썸’타는 중이다. 그러나 이씨는 그녀에게 사귀자고 고백할 마음이 별로 없다. 이씨는 “썸녀가 여자친구가 돼버리면 그녀가 지금 어디서 무얼 하는지, 다른 남자를 만나는 건 아닌지 늘 연락을 하며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에 피곤하다”며 “이에 비해 썸만 탈 때는 바빠서 연락을 잘 하지 못해도 크게 미안할 필요가 없고 만나고 싶을 때만 만날 수 있어서 만족한다”고 말했다.

2년 전 마지막 연애를 끝으로 이씨를 스쳐 지나간 썸녀는 10여명. 이씨는 동시에 3명과 썸을 탄 적도 있다. 이씨는 “몇 년 간은 연애를 하는 듯 안 하는 듯하며 설렘과 편안함을 즐길 계획”이라고 말했다.

20~30대 가운데 연애 대신 썸을 선호하고 이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연애를 하면 겪을 수밖에 없는 감정소모나 관계 유지를 위한 노력이 버거워서, 혹은 취업 걱정 등 불안정한 처지 탓에 썸을 고집하고 있다.

회사원 은지수(26ㆍ여ㆍ가명)씨도 함께 입사한 직장 동료와 두 달 전부터 썸을 타는 중이다. 은씨는 가까운 거리에 사는 썸남과 주말마다 동네 공원에서 운동도 같이하고 평일 저녁에는 종종 호프집에서 ‘치맥’을 하며 수다를 떤다. 매일 카카오톡으로 안부를 주고 받는 것은 기본이고 백화점에 쇼핑을 하러 갈 때도 썸남과 함께다.

주변에서는 이들을 커플로 맺어 주려는 응원도 심심찮게 나오는 상황. 썸남도 내심 은씨와 사귀고 싶은 눈치지만 은씨는 관계를 더 발전시킬 생각이 없다. 그는 “혼자 살다 보니 외로워 연애의 재미를 느끼고 싶지만 경험상 연애는 ‘밀당(밀고 당기기)’등 속앓이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고 내가 상대방에게 구속되기 때문에 답답했다”며 “취업을 하고서는 일에 치이다 보니 운명의 남자를 찾을 시간도 없어 주변에서 만만한 남자와 썸을 타는 게 속 편하다”고 고백했다.

회사원 박승훈(26ㆍ가명)씨도 썸의 편의성 때문에 2년째 누군가에게 썸남으로만 남고 있다. 어설픈 데이트에 그친 사람부터 사귀기 직전까지 갔던 사람까지 그가 썸을 탔던 여성은 다양했다. 각 썸의 '유효기간'은 평균 2~3달. 박씨는 “그 이상 넘어가면 연인관계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아 썸으로 유지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박씨는 “야근, 사내 인간관계 관리에 따른 스트레스 등 직장인을 괴롭힐만한 것들이 한 두 개가 아닌데 여기에 연애까지 끼어들면 한숨만 나온다”며 “모든 것을 감수하고 희생하기에는 젊음이 짧기 때문에 연애 기분을 느끼면서도 에너지 소모가 적은 썸이 좋다”고 말했다. 박씨는 또 “서로가 썸의 한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관계를 정리하는 데도 큰 고민이 필요 없어 구차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썸의 범람은 사회 상황과도 무관치 않다. 취업 등으로 미래가 불투명한 20대에게는 본격적인 연애가 사치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썸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인 측면도 강하다.

취업준비생 최수미(26ㆍ여ㆍ가명)씨는 올해 7월 학원에서 강사 아르바이트를 하며 만난 6살 연하남과 썸을 탔다. 썸남은 최씨가 필요한 물건을 하나하나 챙겨주며 최씨의 호감을 샀다. 썸남은 밤 늦은 시간에 귀가를 하는 최씨에게 전화를 걸어 밤길을 지켜주는 등 남자친구 같은 역할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썸은 1달 만에 끝이 났다. 썸남이 “좋아한다. 사귀자”고 고백했지만 최씨가 “취업 걱정 때문에 내 한 몸도 챙기지 못하는데 누군가에게 관심을 쏟을 여건이 못 된다”며 거절했기 때문이다. 최씨는 “매일 연락하던 사람이 사라져 허전한 마음이 들지만 연애를 하면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고 이것이 입사 준비에 악영향을 줄 것 같아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역시 취업준비생인 김민기(27ㆍ가명)씨도 빠듯한 주머니 사정 때문에 썸을 탈 수 밖에 없었다. 김씨는 지난해 12월 취업 준비 스터디를 하며 알게 된 썸녀와 6개월 가까이 썸을 탔다. 카페에서 함께 공부를 하고서는 청계천 근처에서 산책을 하는 등 소소한 데이트를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도 연애로는 발전하지 못했다. 김씨는 “집세, 생활비 등 여기저기 돈 들어갈 데가 많은데 수입이 없는 입장에서 여자친구까지 관리하기가 어려웠다. 연애를 하면 대게 남자가 밥을 사고 선물도 하면서 데이트 비용을 많이 써야 하는데 썸녀에게는 남자가 꼭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에 부담이 적었다”고 말했다.

연애보다 썸을 추구하는 청춘이 늘고 있는 배경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디지털 시대의 환경적 요인과 가족해체 현상으로 인한 불안심리를 꼽았다.

양 윤 이화여대 심리학과 교수는 “아날로그 시대가 디지털 시대로 전환되면서 사람과의 관계가 가벼워진 측면이 크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얼굴을 마주보고 만남을 갖는 경우가 많아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했지만 요즘 청년들은 모바일을 통해 연락을 하며 썸을 타기 때문에 단절이 쉽고 언제든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동국대에서 ‘결혼과 가족’을 강의하는 장재숙 교수는 “최근 들어 이혼 등 가족해체 현상이 급증하는 가운데 청년들은 ‘내가 선택한 사랑을 끝까지 책임질 수 있을까’하고 의구심을 갖는 경우가 많아졌다”며 “썸은 사랑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감수하기 보다는 상처를 덜 받기 위해 위험부담이 적은 방법을 택하는 심리”라고 분석했다. 장 교수는 또 “연인 사이의 데이트 폭력 같은 문제가 뉴스에 부각되면서 청년들이 이에 대해 위험성을 인식하게 된 것도 원인”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젊은 이들도 썸 문화의 한계는 알고 있었다.

박승훈 씨는 “책임감 없이 유지되는 썸의 특성상 그 관계는 기본적으로 단명할 수 밖에 없고 계속해서 다른 사람을 찾는 것 역시 연애만큼 시간이나 비용이 들어 스트레스를 유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기성세대는 우리가 사람을 가볍게 만난다고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학업, 취업 등 탓에 마음 편하게 연애할 수 없는 슬픈 상황도 이해해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민기 씨도 “연애가 가져오는 의무감을 덜 느낀 것은 좋았지만 내가 힘들 때 속 마음을 털어 놓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며 “내게 딱 맞는 1명을 찾아 마지막 연애를 하고 결혼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고 털어 놓았다.

양 교수는 “썸 문화가 잘못 발전하면 내게 득이 되는 것만 추구하는 이기주의로 변질돼 청년들이 건강한 관계를 거부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며 “사회가 청년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덜어줘 이들이 마음 놓고 연애를 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고 주문했다.

장재진기자 blanc@hk.co.kr

김민정기자 mjkim72@hk.co.kr

김진주기자 pearlkim72@hk.co.kr

정준호기자 junhoj@hk.co.kr

우산 하나 사람 둘

연인일까 '썸'일까. 비가 내려 한적한 서울 청계천을 남녀 3쌍이 걷고 있다.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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