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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제 폐지 11년인데… 외조부모喪 차별하는 기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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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제 폐지 11년인데… 외조부모喪 차별하는 기업들

입력
2016.07.2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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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조부상에 개인 연차 사용”

10대 그룹 대표 계열사 절반

외조부모상에 경조휴가 없어

부의금 등 지원 규정도 전무

인권위 “개선 권고했지만…”

부계 중심적 사고방식은 여전

조직원 대부분 관행으로 여겨

기업 스스로 차별 바로잡아야

서울 소재 한 대기업에 다니는 김모(31)씨는 올해 3월 외할머니 상을 치렀다. 외할머니가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을 대신해 그를 키워 상실감은 더 컸다. 김씨가 회사 인사과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알리자 회사 측은 경조휴가 6일과 부의금 30만원이 지급된다고 설명해줬다. 회사 로고가 붙은 장의용품도 나온다고 했다. 슬픔은 컸지만 번듯한 대기업에 취직한 걸 자랑스러워했던 외할머니를 생각하니 조금은 위로가 되는듯 했다. 하지만 휴가 결재를 올리는 과정에서 회사는 친가가 아닌 외가 장례라는 점을 문제 삼았다. 조모상과 달리 외조모상은 따로 지급되는 휴가와 부의금이 없어 필요하면 개인 연차를 사용할 것을 권했다. 김씨는 26일 “평생 길러주신 외할머니와 아무 관계가 아니라는 선고를 받은 듯해 서러웠다”며 “경조사에도 친가와 외가를 구분하는 것은 명백한 차별”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호주제가 폐지된 지 1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기업에선 경조휴가 규정에 조부모와 외조부모 간 차별을 두는 등 부계 중심적 사고방식을 고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일보가 공정거래위원회 기준 10대 그룹 대표 계열사 10곳을 대상으로 조부모ㆍ외조부모 경조휴가 규정을 확인한 결과, 모든 기업이 조부모상에는 3~6일의 경조휴가를 부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10개 기업 중 절반인 5곳은 외조부모상에 경조휴가를 아예 주지 않았다. 3곳은 조부모상보다 1~3일 가량 적었고, 동등한 휴가일을 책정한 기업은 2곳뿐이었다. 지원 규정도 다르지 않았다. 외조부모 휴가를 주지않는 5개 회사 모두 지원 자체가 없었다.

이런 차별 행위는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에서도 드러났다. 인권위가 2013년 12월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62개 그룹 대표 계열사와 중견기업 67곳을 점검해 보니 외조부모 경조사에 친조부모보다 휴가ㆍ경조비를 적게 지급하는 기업은 절반이 넘는 41곳에 달했다. 이는 기업과 사회 문화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차별 잔재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인권위는 기업들의 이 같은 관행을 차별이라고 판단, 개선을 권고했으나 별다른 시정조치는 나오지 않고 있다. 최근 외조부상을 개인 연차를 사용해 다녀온 직장인 채모(30)씨는 “친가, 외가를 구분해 차별하는 건 구태라고 생각하지만 사내 구성원들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 문제제기를 하기가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명숙 인권활동가는 “기업들이 가족상조차 부계를 우선시하는 관습에 얽매여 있는 탓에 남성중심의 기업문화가 변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경조휴가나 경조비 규정은 정부 지침이 아닌 협약이나 협의에 따라 사업장 자율로 정하는 만큼 기업들 스스로 차별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는 “친가만 배려하는 기업의 경조사 문화를 바꾸려면 조직원들이 지속적으로 불합리한 규정을 감시하고 개선을 요구해야 한다”며 “문제점을 알고도 비판하지 않으면 차별이 관행이 되고 문화로 고착화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인권위 관계자는 “경조사 같은 복지 문제는 노사협의를 거쳐 누구나 수용 가능하게 단체협약 등을 변경하는 방안이 바람직하다”며 “차별을 없앤 기업이 인권지수나 이미지 제고 부분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사회가 장려하는 분위기도 조성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현빈 기자 hb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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