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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등록 : 2018.01.08 13:15
수정 : 2018.01.08 13:16

[김월회 칼럼] ‘지언(知言)’의 힘

등록 : 2018.01.08 13:15
수정 : 2018.01.08 13:16

빛과 소리가 있어 인류는 슬기롭고 똑똑할 수 있었다. 총명이란 말이 각각 ‘귀가 밝다(聰)’, ‘눈이 밝다(明)’는 뜻의 글자로 이뤄진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빛과 소리 사이에 우열을 두기는 어렵다.

그런데 기독교 전통에 따르면 소리가 빛을 창조했다.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는 ‘성경’ 구절이 그 근거다. 빛이 있기 전에 소리가 있었다는 말이며, 소리는 빛이 지니지 못한 역능을 더 지니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장자는 하늘과 땅, 사람을 아예 ‘하늘피리’, ‘땅피리’, ‘사람피리’라고 명명하고는 천지간 만물을 모두 소리 내는 존재로 규정했다. 그 소리가 다 다른 덕분에 만물은 서로 구분된다고 하였다. 사람을 포함하여 만물은, 스스로 빛을 발하지는 못해도 소리는 빚어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빛과 달리 소리는 만물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는 통찰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소리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여겼다. 장자가 하늘피리가 울리면 만물은 저마다의 소리를 낸다고 했듯이, 안팎의 소리가 조응하기 때문이다. 밝은 빛을 마냥 쪼이고 있다고 하여 사람의 성품이 밝아지진 않는다. 반면에 밝은 음악을 주로 들으면 성품이 밝아지기도 한다. 세상 경영의 요결이 담긴 경전에 “기운이 방탕하고 삿되며 경박하고, 가락이 촉급하기만 하고 조화롭지 못하면 사람은 음흉해지고 난잡해진다.”(‘예기’) 식의 경고가 적잖이 실려 있는 연유다. 과학기술 수준이 낮았던 시대서나 통용되던 관념이라 치부하면 오산이다. 지금도 태교가 음악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것을 보면 말이다.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빛으론 사람의 내면을 파고들어 변화시키지 못 하지만,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소리론 그것이 가능했기에 나온 사유다. 게다가 소리는 사방에서 들어와 내 안으로 스며든다. 눈은 뒤를 보지 못하지만 귀는 뒤를 들을 수 있다. 눈은 보는 방향만 인지하지만 귀는 사방에서 이는 소리를 한꺼번에 다 들을 수도 있다. 아무리 음원을 등지고 있어도, 한사코 듣지 않으려 해도 결국은 스며들고 또 스며들어 어느 순간 나의 목소리가 되기도 한다.

하여 옛사람들은 사회 차원서 형성되는 소리는 그 사회의 실정을 잘 드러내준다고 믿었다. 가령 사회 곳곳서 들리는 목소리에서 분노와 원망이 묻어나면 이는 정치가 매우 잘못되었음의 증거로 간주했다. 반대로 그 목소리에 편안함과 즐거움이 깃들어 있으면 그 정치는 틀림없이 조화롭게 이뤄지고 있다고 보았다. 위정자들에게 항상 소리에 주목하라는 요구가 시대를 거듭하여 잇달았던 이유다. 사람은 눈으로는 속을 못 보지만 귀로는 속을 들을 수 있기에 그렇다. 눈은 갈라봐야 비로소 속을 볼 수 있지만, 소리는 귀를 대고 들으면 겉에서도 그 속이 어떠한지를 익히 알 수 있다. 빛은 겉모습만 드러내지만 소리는 속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말은 사람이 내는 대표적 소리다. 하여 사람의 소리에 온전히 귀 기울이려면 말을 경청하면 된다. 지금 우리는 시민 개개인이 주권자인 사회에서 살고 있다. 우리 하나하나가 다 위정자인 셈이다. 공자가 누누이 강조한 “말을 살펴 파악할” 줄 아는 ‘찰언(察言)’이나 ‘지언(知言)’의 역량을 갖출 필요는 지금 우리에게도 당연하게 요청된다. 단지 남의 말을 듣고 그 문면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행간에 스며있는, 그렇기에 문면엔 드러나 있지 않은 의미와 의도, 욕망까지 낱낱이 헤아리기 위해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치우친 말로는 그가 숨긴 것을 알아내고 과도한 말로는 그가 탐닉하고 있는 바를 알아낸다. 사악한 말로는 그가 일탈하고 있는 바를 알아내고 감추려는 말로는 그가 궁색해 하는 바를 알아낸다.(‘맹자’)

자신의 장점을 여쭤온 제자에게 “말을 아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던 맹자의 말이다. 소리는, 깨어있지 않으면 부지불식간에 스며들어와 자신의 목소리가 되어 자기를 움직이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말을 살펴 파악하지 못하면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따라 행한 듯싶지만, 결국은 남의 목소리에 놀아난 셈이 되고 만다.

민주주의 사회는 온갖 목소리가 자유롭게 발화되고, 선의의 경쟁을 거쳐 정책으로 수렴되는 체제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자기가 빚어내는 소리일 때의 얘기다. 자기가 빚어낸 소리의 모든 책임을 자기 자신이 짊어져야 함이 기본 전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들이 빚어낸 소리를 왜곡하고 악용하며, 어떻게든 기득권을 유지하려 드는 세력의 목소리마저 긍정해야 하는 건 아니다. 자기가 낸 소리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니기에, 그들은 끊임없이 남 탓하며 호도하고 회피한다. 어차피 작정하고 한 막말인데 굳이 책임질 필요는 없다는 심보다.

‘황금 개’의 해인 2018년, 6월엔 문재인 정부 중간평가 성격의 전국지방선거와 재보궐 선거가 치러진다. 그 어느 때보다 더 주권자인 시민이 ‘지언’의 힘을 발휘할 때인 듯싶다. 나를 움직이게 한 소리가 알고 보니 ‘견음(犬音)’이었다면, 이 얼마나 억울하고 속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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