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주인을 욕되게 한 자, 벗어라 그 옷을!

알림

주인을 욕되게 한 자, 벗어라 그 옷을!

입력
2016.11.22 11:00
0 0
옷은 인간이 소속된 자리와 권위를 드러낸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옷은 인간이 소속된 자리와 권위를 드러낸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최근 한국사회를 뒤흔드는 국정농단 사태를 보고 있으면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이 떠오른다. 새 옷을 사는 데 모든 돈을 쓰는 임금님, 그는 군사와 백성들의 처우엔 눈감은 채 오로지 신상구매에 혼이 팔려있다. 어느 날 직물장사라고 자칭하는 사기꾼 두 명이 세상에서 가장 수려한 옷감을 짤 수 있다며 찾아온다. 임금은 이들에게 돈을 주고 옷감을 짜라고 했는데, 놀라운 것은 이 옷감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무능하고 멍청한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폭탄선언을 한 것. 부활절 행사 날 이 사기꾼들이 지은 옷을 입고 행차에 나선 임금은 자신의 눈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눈치 챌까 두려워하며 걷는다. 사람들 또한 멍청하고 무능하다는 말을 들을까봐 옷이 보이지 않는다고 진언하지 않았다. 현실 속 대통령은 사기극을 인지할 능력 자체가 없었고 나아가 농단의 공범이었다는 점, 교활한 정치엘리트들은 임금을 대역배우로 내세워 자신의 이권만 챙겼다.

세상의 모든 만물은 옷을 입는다. 하늘의 새는 깃털을, 지상의 동물은 가죽을, 정치적 권력자는 리무진과 경호원이라는 보호 의상을 입는다. 겨울 한기에 앙상한 뼈대만 남은 나무를 가리켜 옷 벗을 라(裸)자를 써서 나목(裸木)이라 칭한다. 라(裸)에는 벌거숭이와 나체, 무일푼이란 뜻도 담겨있다. 인간에게서 제2의 피부인 옷이 벗겨질 때의 ‘어떤 상태’를 보여주는 것 같다. 겨울 산에 소복소복 쌓인 눈은, 산의 실루엣을 단순하게 만들어주는 옷이다. 여름이 되면 산은 초록의 옷을 입는다. 인간은 자연이 보여주는 이 옷 입기(Dressing)를 자의식을 갖고 사회라는 무대에서 행하는 유일한 존재다. 옷은 인간이 소속된 자리와 권위를 드러낸다. 이들은 자신의 직무를 타인과 구분하기 위해 유니폼을 입는다. 차분한 검정색 법복과, 위생적인 하얀색 의사가운을 입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공적인 의미에서 ‘옷을 벗다/벗기다(Undressing)’란 표현을 쓸 때가 있다. 이것은 자신이 몸 담아온 조직 혹은 권력에서 멀어짐을 뜻한다. 옷을 벗는 행위는, 조직에 속한 개인의 결단에 의해 이뤄지기도 하고 역으로 그 조직에 정당성을 부여한 국민에 의해 ‘벗겨짐’을 당하기도 한다. 대통령을 비롯해 국가 상급기관에 몸담은 이들의 옷은, 국민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이 영광은 그들이 잘나서 얻어낸 것이 아니라, 국민 각자가 받은 양도 불가능한 권리로서의 자유와 영광을 함께 나누었기에 얻게 된 것이다. 즉 그들의 영광은 그 원천이자 주인인 국민에게서 파생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 영광을 오로지 자신들의 몫으로 알고 있는 자들은, 그 옷을 벗겨 참회시켜야 한다.

영국의 정치 철학자 토머스 페인(1737~1809)은 민주주의가 인간의 자연권을 보장하는 유일한 정부 형태라고 믿었다. 그는 1776년 1월에 ‘상식(Common Sense)’이라는 50페이지의 짧은 논설문을 익명으로 발표한다. 그는 글에서 식민지 주민들이 ‘느끼지 못한 채’ 침해 당한 권리를 하나씩 알게 하고, 이 깨달음을 보편적인 느낌으로 바꿀 때, 이것이 곧 상식이 된다고 주장한다. 페인은 책에서 “정부는 옷과 마찬가지로 잃어버린 순수의 상징이다”라고 말했다. 이때의 옷이란 순수의 상태인 에덴에서 유폐된 인간이 지어 입은 옷을 말한다. 수치심을 벗고 새로운 시대의 순수의 옷, 정치의 체제를 만들자고 했던 페인의 목소리엔 힘이 넘쳤다. 그의 글은 미국의 시민혁명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끌어내는 기폭제가 되었고 미국의 독립선언문 작성에 영향을 미친다.

최순실 게이트는 우리 국민들 사이에, ‘침해 당한 권리’를 하나씩 깨닫게 해주는 사건을 넘어, 국가의 정당성과, 통치자에게 부여한 국민의 영광을 복원하기 위한 거대한 보편의 흐름으로 변하고 있다. 우리 안의 상식을 되찾는 일인 것이다. 과히 시민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의 옷을 벗기는 일은, 그저 권력을 내려놓게 하는 일이 아니다. 옷을 벗기는 일은 마치 문지방을 연결하는 돌쩌귀처럼, 지금의 실험을 용기 있게 감행할 때, 우리가 새로운 형질의 정체성을 가진 정부의 일원이 될 수 있음을 가능케 하는 기적의 사건인 것이다.

김홍기 패션큐레이터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