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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권력부터 복면을 벗어라

입력
2015.11.29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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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24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근혜 대통령이 24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당당하다면 왜 얼굴을 가리느냐, 결국 이슬람국가(IS)나 마찬가지 아니냐는 서슬 시퍼런 비아냥거림과 함께 여당이 발의한 복면금지법안을 둘러싸고 논란이 뜨겁다. 사실 한국에서 복면 금지를 둘러싼 논의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3년 경찰이 의견을 낸 이래 2000년대 후반 수 차례에 걸친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개정 과정에서 복면 금지 조항이 논의되었지만, 결국 인권 침해 우려로 번번이 무산된 바 있다. 요즘 복면금지법안에 대해 TV 예능프로그램인 ‘복면가왕’도 폐지하란 말이냐는 여론의 뭇매가 쏟아지고는 있으나, 사실 이 법안은 처음부터 시위하고 저항하는 시민들을 겨냥한 것임은 분명하다.

하도 선진국에 다 있는 법이라기에 잠시 조사를 해봤다. 실제로 여러 나라가 다양한 이유로 불법 시위나 폭동 중에 복면 착용을 처벌하는 법률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인상적인 사실은 최근 세계 경제가 악화되면서 미국과 유럽 곳곳에서 경제적 양극화와 복지 축소 정책에 저항하는 시위가 격화되는 과정에서 복면 금지 조항을 신설하거나, 아니면 오랫동안 사문화되어 있던 복면 금지 조항을 되살려 낸 나라들이 많다는 점이다.

테러로부터의 위험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복면금지법의 세계적 유행은 기실 시민적 권리의 축소가 불러온 사회적 불안에 대해 억압적인 공권력이 대처하는 방법인 셈이다. 불법과 합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일이 다반사인 거리 시위의 특성 상 이들 나라에서 역시 결국 복면금지법은 시위 자체를 처벌하기 위한 법이라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그러니 이제껏 시위에 참석한 시민들을 폭도와 구분하지 않고 시위 자체를 봉쇄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 온 한국에서 복면금지법안에 대한 우려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미국에서 복면금지법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어 온 과정을 보면, 복면금지법도 그 제정 맥락에 따라 의미가 매우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오랫동안 잊혀 있다가 월가 점령 시위 과정에서 적용된 미국 뉴욕주의 복면금지조항 역사는 184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뉴욕주 북부의 소작인들은 광대한 토지를 단 몇 개의 집안이 중세적인 방식으로 지배하는 데 항의하는 운동을 벌였는데, 이를 진압하기 위해 투입된 공권력에 원주민인 양 얼굴의 가면을 쓰고 맞서 싸우면서 복면금지조항이 만들어졌다. 미국에서 정체를 감추고 투쟁한 원조는 미국독립운동의 영웅인 보스턴 차 사건의 주역들이었으니, 이를 불법화하는 것은 당시에도 논란거리였다.

그런가 하면 미국의 다른 많은 주들이 복면금지법을 제정한 것은 20세기 초ㆍ중반에 걸쳐 인종차별주의로 악명 높은 KKK단의 폭력행위를 처벌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 KKK단은 익명으로 의견을 표시하고 집회와 결사를 할 수 있도록 해달라면서 복면할 권리를 요구하는 소송을 벌였다. 법 제정 당시와 비교하여 KKK 세력이 눈에 띄게 감소해 공중에 위협이 되지 않으니 익명으로 남을 권리가 더 중요하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혐오 범죄를 자행하는 이들이 신분을 감추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우세하였다. 그렇게 존속된 법이 21세기에 와서 시위하는 시민들의 복면을 벗기는 법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사례는 복면 금지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복면을 누가 왜 벗기려는 지 따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20세기 중반 KKK단이 그러했듯이, 실제로 얼굴을 가린 채 종종 법률의 비호까지 받으면서 더 큰 문제를 일으키는 쪽은 권력을 가진 자들이다. 국정교과서 반대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복면을 하지 말라면서 집필자들은 어째서 익명으로 보호를 받는 것인가. 또한 세월호 같은 큰 사건이 나도 책임자를 가려 밝히는 일은 요원하기만 하지 않는가. 그러니 지금 복면을 벗어야 한다면, 그것은 권력을 가진 쪽이다. 그 때까지 시민에게는 익명으로 남을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백영경 한국방송통신대 교수ㆍ문화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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