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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장수 대법원장… '성공한 법관' '친일ㆍ반민주' 두 얼굴

입력
2015.07.13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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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인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인혁당 재건위’사건의 상고를 기각한다. 도예종 등 8명 사형, 김한덕 등 7명 무기징역, 나머지 13명 15~20년 징역형이라는 비상고등군법회의 원심이 그로써 확정됐고, 판결 후 18시간 만인 4월 9일 새벽 사형이 집행됐다. 당시 대법원장이 민복기(1913~2007ㆍ사진)였다.

30년 뒤인 2005년 법원은 재심을 개시했고, 2007년 1월 전원 무죄를 선고했다. 8월 21일 법원은 국가가 유족들에게 637억여 원(원금 245억여 원+이자 392억여 원)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심 무죄판결이 나오고 5개월여 뒤인 2007년 오늘(7월 13일) 민복기가 사망했다.

민복기는 한국의 최장수(1968.10~ 78.12 재임) 대법원장이다. 유신정권은 78년 정년 퇴임하는 그에게 “질서 확립의 공”을 기려 최고훈장인 태극 무궁화장을 수여했다. 전두환 정권에서 그는 국정자문위원을 지냈고, 자신의 호를 딴 ‘인재(仁齋)법률연구소’를 개설했고, 헌정제도연구원장을 역임했다.

그는 조선과 대한제국과 조선총독부의 벼슬아치 민병석(1858~1940)의 차남이다. 민병석은 고종의 성균관 도승지와 예조참판, 평안감사 등을 지냈고, 대한제국의 헌병대 사령관 등 요직을 누렸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5회 연임했다. 여흥 민씨 혈족으로 청과 가까웠던 민비(명성황후)의 곁에 섰다가, 아관파천 이후 이완용과의 친분으로 친러파가 됐고, 역시 이완용과 함께 친일파로 옮겨 앉았다. 아비의 작위(자작)을 물려받은 장남 민홍기(1883~1951)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민복기는 경성제국대학 법학부 재학 중이던 1936년 일본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해 경성지법판사가 됐고, 해방 후 법무부 검찰국장(검찰총장)과 이승만 전 대통령 비서관, 법무 차관을 거쳐 61년 대법원 판사가 됐다. 63년 박정희 정권 출범 후 법무장관을 지냈다. 검찰과 법원 최고위직과 내각 각료까지 지낸 유일한 법관인 그는 2000년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에 선정됐고, 2005년 서울대 학생회의 ‘친일잔재청산위원회’가 뽑은 ‘서울대의 친일 인물’ 1차 명단 12명에도 선정됐다.

2007년 참여정부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가 민병석의 ‘친일 재산’ 국가 환수를 결정하자 후손들은 취소소송을 제기했고, 패소했고, 국가는 이미 매각한 일부 토지에 대해서도 부당이득반환청구소송을 제기해 승소했다.

75년 사법살인의 최연소 희생자 여정남은 31년 11개월을 살았다. 경북대 학생회장을 지냈고, 한일협정 반대투쟁 등으로 3차례 재적됐고, 군대를 다녀왔고, 유신반대 시위 등으로 3차례 구속됐다. 감옥 바깥에서 구타와 고문 없이 산 날은 25년 남짓이었다. 그는 대구 칠곡의 한 묘원에 묻혔다. 민복기는 93년 7개월을 살고, 국립대전현충원에 묻혔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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