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음식이 연대의 힘... 25년 차 사회운동가 요리책 쓰다

알림

음식이 연대의 힘... 25년 차 사회운동가 요리책 쓰다

입력
2016.03.31 16:49
0 0
청주에 있는 마을카페 ‘이따’에서 요리하는 박영길씨. 지역의 노동자와 활동가들이 들러 밥을 먹기도 하고 투쟁 현장으로 밥을 싸 들고 출동하기도 한다. 포도밭 제공
청주에 있는 마을카페 ‘이따’에서 요리하는 박영길씨. 지역의 노동자와 활동가들이 들러 밥을 먹기도 하고 투쟁 현장으로 밥을 싸 들고 출동하기도 한다. 포도밭 제공

투쟁 현장은 이념의 세계다. 생명, 인권, 공생, 존중. 가치로운 신념에 대한 열망은 때론 너무 뜨거워져 사람을 집어 삼키기도 한다. 투쟁 과정의 추위, 배고픔, 빈곤에 싸우는 이들은 하나 둘 지쳐가고, 결국 눈 앞의 인권을 위해 장기적 인권을 포기하는 모순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진다.

청주시 사직동을 기반으로 한 생활교육공동체 ‘공룡’에 속한 활동가 박영길(45)씨가 펴낸 ‘요리활동’(포도밭)은 요리책이다. 대학 졸업 후 25년 간 사회운동에 매진한 박씨가 처음 낸 책이 정치철학이나 사상이 아닌 음식, 그것도 구체적인 조리법이 담긴 책이란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가 생각하는 지속가능한 투쟁의 비결은 일단 잘 먹는 것이다.

“모든 사회 운동은 활동가들의 희생을 요합니다. 자기가 다치거나 연대하던 사람이 죽는 걸 보거나 하면서 활동가들의 심신이 황폐해지는 걸 오랫동안 지켜봤어요. 적어도 우리가 만든 ‘공룡’에서는 이런 아픔을 일상 속에서 적절히 해소할 수 있었으면 했어요. 그 방법 중 하나가 먹는 거라도 잘 먹는 겁니다.”

박영길씨가 만든 도미찜. 모든 음식을 ‘야매’로 만든다는 박씨는 중요한 건 먹는 사람이 뭘 좋아하는지를 기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포도밭 제공
박영길씨가 만든 도미찜. 모든 음식을 ‘야매’로 만든다는 박씨는 중요한 건 먹는 사람이 뭘 좋아하는지를 기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포도밭 제공

군대 갔을 때를 빼고는 청주에서 떠나 본 적이 없다는 박씨가 몇몇 활동가들과 함께 공룡을 만든 것은 6년 전이다. 다큐멘터리 제작, 마을 학교 만들기, 농사 등 활동 분야는 각자 다르지만 자본주의 세상에 맞서 주체적인 공동체를 조성하자는 데는 뜻을 같이 한다. 이중 박씨의 업무는 활동가들에게 음식을 만들어주는 일. 공룡의 거점인 마을카페 ‘이따’는 지역 활동가와 노동자, 청소년들에게 늘 문을 열어 놓고 있다.

가끔 투쟁 현장으로 밥을 싸서 원정을 가기도 한다. 메뉴도 화려하다. 칼국수, 된장국 같은 흔한 메뉴부터 붕어찜, 스키야키 등 난이도가 좀 있어 보이는 음식, 그리고 물 마리니에르, 아게다시도후, 어향동구처럼 이름조차 생소한 것들도 있다.

농사일로 바쁜 부모님이 세운 ‘자기가 먹을 음식은 자기가 만든다’는 원칙은 박씨를 만능 요리사로 키웠다. 35년 남짓의 요리 경력이 남긴 것은 무한한 자신감. 무슨 음식이든 할 수 있냐는 말에 그는 “다 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답했다. “어차피 ‘야매’니까요.(웃음) 꼭 정식 레시피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만든 동파육이 현지 것과 좀 다르다 해도 뭐 어떻습니까. 어차피 먹어본 적도 없어요.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기억입니다. 음식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그 사람을 기억하게 돼요. 어떤 맛을 좋아했고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그래서 음식이 소중한 것 같습니다.”

‘요리활동’ 책을 낸 박영길씨. 포도밭 제공
‘요리활동’ 책을 낸 박영길씨. 포도밭 제공

한진중공업 노동자들과 연대하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을 때 만든 묵밥과 연잎밥은 아마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박씨는 공룡 활동가들과 함께 전날 인근 저수지에서 직접 딴 연잎을 식촛물로 깨끗하게 씻은 뒤 잡곡밥 50인분, 묵밥을 위한 시원한 육수와 쌀밥 60인분, 그리고 부침개까지 부쳐서 현장으로 출발했다. 한창 행진 중이던 노동자들과 섞여 영도조선소까지 2시간 가량 행진한 이들은 결국 경찰이 쳐놓은 차벽 앞에서 치열하게 대립한 뒤 최루탄 가스와 신발, 안경이 뒹구는 8차선 도로 위에서 묵밥을 풀었다. “시원했던 육수가 미지근해 져버렸지만 순식간에 동날 정도로 인기가 좋았어요. 어떤 장소에서는 평범했던 음식이 다른 장소에서는 거대한 연대가 되기도 합니다.”

박씨의 음식은 ‘투쟁 권하는 사회’를 버티게 하는 소소한 힘이다. 각자의 소소한 일상은 다시 모여 거대한 힘으로 환원된다. “싸움의 대상이 클수록 작은 일상이 중요합니다. 이게 제가 공룡 활동가들과 함께 먹는 일에 욕심을 부리는 이유입니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