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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필의 제5원소] 컨택트, 2017

입력
2017.02.17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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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창의 원작 “네 인생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개봉작 “컨택트”가 화제다. 다리가 일곱 달린 영화 속 외계인 ‘헵타포드’가 쓰는 언어는 인간의 언어와 다르다. 헵타포드의 문자는 더욱 기묘하다. 원을 기본으로 해서 원주 위에 촉수나 나뭇가지 모양의 복잡한 문양이 더해진 모습이다. 모양만 기묘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문장은 일차원적이며 명사나 동사, 또는 주어와 서술어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지만 헵타포드의 문자는 그 자체가 완결적인 하나의 문장이다. 분절적으로 나누려는 순간 전체 구조가 무너진다. 이 완결적인 구조는 헵타포드의 시간개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간에게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헵타포드에게 시간은 일차원적이지 않다. 원형의 문자처럼 시작도 끝도 없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인간의 개념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순간의 사건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하나의 완결적인 일대기를 만들 뿐이다.

대개 영화가 시작할 때 화면에 영화 제목이 멋지게 등장한다. “컨택트”에서는 영화가 다 끝난 뒤에야 “Arrival”이라는 원제가 스크린에 떠오른다. 시작과 끝이 구분되지 않는, 지극히 헵타포드적인 방식이다. 나는 영화가 끝난 뒤에야 처음으로 “Arrival”이라는 영화제목을 보고서는, 지금까지 내가 봤던 영화는 그저 미래의 모습을 본 것일 뿐이고, 실제 영화는 지금 시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되었다. 지금 내 기억 속의 모든 과거가 사실은 아직 내가 겪지 않은 미래의 일이라면 어떨까?

우리 모두 잠시 헵타포드가 되어, 2017년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이 혼란이 모두 아직 일어나지 않은 허상이라고, 그리고 실제 우리의 현실은 2012년 12월 1일이라고 가정해 보자. 헌정유린과 국정농단의 참담한 ‘미래’를 알게 된 우리는 며칠 뒤 대선에서 과연 다른 선택을 할까? 박근혜를 선택하지 않을 자유의지가 있을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마자 사람들은 너도나도 “박근혜가 그럴 줄은 몰랐다”고 입을 모았다. 헵타포드의 힘을 빌어 2012년 12월 1일 ‘현재’, 우리는 “박근혜가 그럴 줄 알고 있다.”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아마 박근혜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다.

딱하게도 우리에겐 헵타포드의 능력이 없다. 하지만 그럭저럭 쓸 만한 두뇌는 갖고 있다. 인간은 오랜 세월 자신의 두뇌를 이용해 미래를 보거나 겪지 않고서도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을 키워 왔다. 그 선봉에는 과학이 있었다. 과학적인 사고와 방법론은 미래에 대한 가장 믿을만한 예측을 내놓는다. 좀 어설프긴 하지만, 미래를 보지 않고도 어느 정도는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

다행히 지금 우리는 2022년이 아니라 2017년에 살고 있다. 헵타포드의 능력을 빌려 2022년의 우리 모습을 미리 볼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면 다소 불만족스럽더라도 우리의 지적 자산을 총동원해 미래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아무개가 그럴 줄 몰랐다”는 말이 다시 나오지 않으려면 철저한 사전검증은 필수이다. 누가 새로운 대통령이 되었을 때 대한민국이 어떻게 바뀔지, 증거와 데이터에 기초한 평가와 예측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한편, 실제 벌어진 현실을 눈앞에 두고도 이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헌정유린과 국정농단의 공범이라 할 수 있는 새누리당은 당명을 자유한국당으로 바꾸면서 반성은커녕 오히려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 하고 있다. 100년쯤 전 우리 선조들이 20~21세기 대한민국의 굴곡진 현대사를 헵타포드처럼 내다볼 수 있었다면 민족반역자 처단만큼은 가장 확실하게 하지 않았을까? 또다시 다행인 것은 지금 우리가 심판과 청산의 후회를 후대에 남기지 않을 수 있는 2017년에 살고 있다는 점이다. 헵타포드의 능력은 없지만 우리 ‘Human’은 지혜로운 사람, 호모 사피엔스이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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