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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신 주커먼의 서글프고 적나라한 노쇠, 그리고 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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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신 주커먼의 서글프고 적나라한 노쇠, 그리고 퇴장

입력
2014.08.15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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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 지음ㆍ박범수 옮김

문학동네 발행ㆍ384쪽ㆍ1만4,500원

주커먼 시리즈 마지막 소설

교묘하게 맞물린 저마다의 이야기

휩쓸리듯 빠져드는 속도감 일품

필립 로스
필립 로스

미국 현대문학의 거목이라 불러도 좋을 필립 로스(81ㆍ사진)의 2007년도 장편소설 ‘유령 퇴장’은 작가의 서사적 분신인 네이선 주커먼이 등장하는 아홉 번째이자 마지막 소설이다. 로스의 대표작을 대거 배출한 ‘주커먼 시리즈’의 막을 내린 작품이라는 점만으로도 섭섭하건만, 71세의 노작가로 등장한 ‘주커먼 선생님’이 분노의 대가다운 목소리로 폭발시키는 무지막지한 노쇠의 국면들이 또한 서글프고 적나라해 회오리에 휩쓸리듯 빠져들게 되는 소설이다. 주커먼 시리즈의 첫 책 ‘유령작가’(1979)와 수미쌍관을 이루는 듯한 제목 ‘유령 퇴장(Exit Ghost)’은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에서 뱅코 유령이 무대에 올랐다 내려갈 때 쓰인 지문 ”유령 퇴장”에서 따온 제목이다.

미국의 유명 소설가 주커먼은 11년 전 뉴욕을 떠나 산골 호숫가에 홀로 칩거하며 세속의 잡사들과 연을 끊고 작품 집필에만 골몰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의 유대인 비판을 이유로 살해협박이 계속된 탓에 뉴욕을 떠나게 됐지만, 이미 “고독한 생활방식을 정복”한 그는 살해협박이 끊어진 이후에도 은둔의 삶을 이어간다. 전립선 암 수술 후 얻게 된 발기부전과 요실금도 이유 중 하나다. 로스의 적나라하고 집요한 서술 속에서 요실금은 특히 끔찍하다. 주커먼이 11년 만에 뉴욕 나들이에 나서게 된 것도 요실금 치료 때문이었다.

소설은 주커먼이 콜라겐 삽입 시술을 받기 위해 뉴욕에 가 지내는 1주일간을 그린다.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과 마찬가지인 1주일. 정치문제든 여성문제든 욕망 따윈 완전히 버렸다고 믿고 있는 주커먼은 요실금 1차 시술로 스스로도 정신 나갔다고 여겨지는 회춘에 대한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힌다. 들뜬 마음으로 비뇨기과를 나오던 그는 엘리베이터에서 신인 작가 시절 단 한번 만났을 뿐이지만 결혼까지 생각했던 여인을 우연히 만나 그녀를 미행한다. 한때 주커먼이 숭배했던 작가 로노프의 어린 정부였지만, 이제는 뇌종양 수술로 머리 반쪽을 삭발한 초라한 노파가 된 여인.

뉴욕의 번잡한 분위기에 다시 삶으로 복귀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 주커먼은 급기야 1년간 자신들의 뉴욕 아파트와 교환할 조용한 시골집을 찾는 신문 광고를 보고 충동적으로 광고를 낸 젊은 부부에게 전화를 걸고, 이제 고작 서른 살인 그 아내를 보자마자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에 휩싸이고 만다.

소설은 방사형의 서사축으로 구성돼 있다. 주커먼의 노트 속에서 허구의 대화로만 성적 긴장감을 주고 받는 노작가와 젊은 유부녀, 문학사에서 잊혀져 버린 로노프의 근친상간을 파헤쳐 그를 문학사에 귀환시키려는 전기작가 클리먼과 소설의 전기적 해석에 극렬히 반대하는 주커먼, 뇌 절제술로 정신이 온전치 못한 로노프의 여인과 주커먼 사이에 전개되는, 노화라는 사태가 촉발한 연대와 우정이 저마다의 이야기인 동시에 교묘하게 맞물리면서 서사의 회전축에 가속도를 부여한다. 어마어마한 작가로서의 필립 로스를 재확인하는 경험이자 오래도록 함께 늙어가는 작가를 가진 미국 독자들을 질투하게 되는 독서다.

박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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