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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도] 강자들을 위한 법원

입력
2014.10.30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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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고등법원 행정7부는 지난 16일 2014학년도 수능 세계지리 8번 문항에 출제 오류가 있다며 수험생이 평가원을 대상으로 낸 소송 2심에서 사실상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사진은 선고가 이뤄진 서울고등법원 별관의 모습.
서울고등법원 행정7부는 지난 16일 2014학년도 수능 세계지리 8번 문항에 출제 오류가 있다며 수험생이 평가원을 대상으로 낸 소송 2심에서 사실상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사진은 선고가 이뤄진 서울고등법원 별관의 모습.

판결문은 오답도 정답으로 만들 수 있다. 지난해 12월 16일, 서울행정법원 행정13부(부장 반정우)의 수능 오류 판결문. ‘2012’라고 표시된 세계지도가 제시되고, ‘A(유럽연합)는 B(북미지역)보다 총생산액의 규모가 크다’는 지문이 있다. 2012년에는 모든 통계에서 B의 총생산액이 A보다 컸다. 하지만 법원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주장대로 ‘옳은 지문’이라고 했다.

‘객관적 사실’을 무력화하는 판결문의 현란한 화술은 감탄(또한 좌절)할 정도다. 요약하자면 ①명백히 옳은 지문과 틀린 지문을 제외하면 답항을 고르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②다른 문제도 특정 연도 통계를 알고 있는지 묻는 것은 없다, ③지문 안에 2012라고 기재된 것이 아니라 지도에 표시돼 있을 뿐이어서 2012년을 기준으로 묻는 지문이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할 수 없다, ④고교 세계지리 교육 목적에 비춰볼 때 특정 지역의 특정 연도에서의 통계차이를 교육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 ⑤평균 수준의 수험생이 신문ㆍ방송 등을 통해 유럽연합과 북미자유무역협정의 2012년 총생산량을 쉽게 알 수 있었다고 볼만한 증거가 없다 등이다. 결론은 ‘정답을 선택 못할 정도는 아니다.’

이 소송을 겪은 한 수험생은 법조인의 꿈을 접었다고 한다. 학부모는 “정답이 없다고 아무리 주장해도 평가원이 대형 로펌 변호사를 선임해 대응하니 속수무책이었고 그런 세계를 본 아이는 너무나 질려버렸다”고 말했다.

서울고법 행정7부(부장 민중기)가 최근 “객관적 사실에 부합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바로잡히기는 했지만, 때가 늦었다는 점에서 1심 결론은 뼈아프다. 1심 재판부가 정말 정답을 몰라서 그렇게 판결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새 뿌리 깊어진 ‘강자들을 위한 법원’의 단면인 것 같아 괴롭다. 현란한 논거의 길까지 개척한 것은 어떤 비밀스런 목표가 없이는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소수를 구제하기 위해 굳이‘사회 혼란’을 감수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을까. 문제 피해자가 수험생 대다수였다면 어땠을까.

판결은 법에 따른다고 하지만, 사실 수많은 자의적인 요소가 개입한다. ‘현저한’‘상당한’‘합리적 의심’등 마법의 단어들은 유죄를 무죄로, 승소를 패소로 만들 수 있다. 검찰은 “같은 증거수준에도 하위급 공무원은 유죄가 나오고, 거물급은 무죄가 나온다”고 푸념하곤 한다.

요즘 이해할 수 없는 판결이 나오면, 대상자의 신분을 바꿔 생각해보는 버릇이 생겼다.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을 촉발시킨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올해 총선도 있고 대선도 있고, 종북좌파는…다시 정권을 잡을라 그러고”등의 발언을 했지만, 법원은 “목적성ㆍ능동성ㆍ계획성 있는 선거운동으로 볼 수 없다”고 공직선거법 위반 무죄를 선고했다. 반면 영남대 전 강사 유모씨는 박근혜 대통령 후보의 역사관 등을 비판한 특정 신문 기사들을 수업시간에 활용했다는 이유로 “능동적ㆍ계획적 선거운동”이라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이 수사한 사건을 맡았던 변호사가 “과거 황 장관에게 상품권을 직접 줬다”고 말한 것을 보도한 기사에 대해, 서울중앙지법은 “황 장관에 대한 명예훼손”이라고 판결했다. 반면 증거조작 사건 피해자 유우성씨의 비자(사증) 번호가 지워진 채 방송된 것을 보고, 한 신문사가 “비자가 위조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한 것은 문제없다고 판결했다. 방송사가 개인정보보호를 위해 모자이크 처리했다고 밝혔는데 말이다. 만약 변호사가 유씨에게 금품을 줬다고 했다면, 또 방송사의 모자이크 처리만 보고 황 장관이 비자를 위조했다고 했다면 법원은 똑같이 판결했을까.

이는 보수, 진보의 문제도 아니다. 대상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즉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습성일 뿐. 대법관 취임사에서 듣는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는 과연 어디에서 실현되고 있나.

일부 판결의 문제라고 할지 모르나, 국민들은 일부 중요한 판결에서 법원 전체의 모습을 본다. 어느 변호사는 대형로펌행을 노리는 판사들이 로펌과 결탁하기도 한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법관 승진평가의 문제라고도 한다. 이제 원인을 찾아야 할 때이다. 영재 소리 듣고 자랐을 판사들이 그 ‘똑똑함’을 기만을 위해 쓰는 것을 지켜보며 슬퍼만 하기에는, 그것이 무너뜨리는 것이 너무 크다.

이진희 사회부 기자 riv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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