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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계셔서 이젠 외롭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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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계셔서 이젠 외롭지 않습니다"

입력
2015.05.01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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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과 권정생. 사진 제공 양철북출판사/2015-04-29(한국일보)
이오덕과 권정생. 사진 제공 양철북출판사/2015-04-29(한국일보)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

이오덕ㆍ권정생 지음

양철북 발행ㆍ372쪽ㆍ1만3,000원

세상을 떠난 지 12년, 8년 된 두 사람이 30년 동안 주고 받은 편지를 읽으며 가슴이 뭉클해진다. 어쩜 이리 애틋하고 아름다울까. 사람과 사람의 진정한 만남이 어떤 것인지 실감케 하는 한 줄 한 줄이 느껍기만 하다.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는 ‘강아지 똥’ ‘몽실 언니’ 등 걸작을 남긴 아동문학가 권정생(1937~2007)과, 아동문학가이자 아동문학 평론가로 온 삶을 아이들과 함께한 이오덕(1925~2003)이 주고 받은 편지 모음이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1973년 1월부터 이오덕이 세상을 떠나기 아홉 달 전인 2002년 11월까지 오간 편지를 책으로 묶었다. 이 가운데 일부는 2003년에 잠시 책으로 나왔다가 바로 절판됐다. 이오덕의 유족과 권정생의 뜻에 따른 결정이었다. 죽고 나서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책으로 펴내라는 권정생의 뜻에 따라 이제야 정식 출간됐다.

1973년 1월 8일, 이오덕은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무명 저고리와 엄마’의 동화작가 권정생이 혼자 살고 있는 안동의 일직교회 문간방으로 찾아갔다. 겨울날 해거름에 찾아온 손님이 돌아간 뒤 권정생은 편지를 썼다. “바람처럼 오셨다가 많은 가르침을 주고 가셨습니다. 일평생 마음 놓고 제 투정을 선생님 앞에서 지껄일 수 있었습니다.”편지를 받고 사흘 뒤 이오덕은 답장을 보냈다. “동화 한 편 보내 주시면 상경한 길에 어느 잡지에나 싣게 되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이오덕은 마흔아홉, 권정생은 서른일곱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평생토록 애틋하게 이어졌다. 이오덕은 초등학교 교사, 권정생은 중증 결핵 환자였다. 병든 몸으로 견디기 힘든 통증과 지독한 가난, 의지가지 하나 없는 외로움을 평생 짊어졌던 권정생은 훗날 이렇게 썼다. “선생님을 만나 이젠 외롭지 않습니다.”(1973.3.14) “앞으로도 역시 제가 쓰고 있는 낙서 한 장까지도 선생님께 맡겨 드리고 싶습니다.”(1974.4.9) “선생님이 만약 안 계셨더라면 제가 여지껏 살아남았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1986. 2.13)

이오덕은 어른, 아이 모두 권정생의 작품을 읽혀야 한다는 생각으로 온 힘을 다해 권정생을 세상에 알렸다. 이오덕의 정성으로 권정생의 동화가 출판되기 시작했고 권정생은 죽을 힘을 다해 동화를 썼다.

두 사람의 편지는 감출 것도 자랑할 것도 없고, 그저 있는 그대로 서로 염려하고 위로하는 마음으로 가득하다. 이오덕은 내내 권정생의 건강을 걱정했고 가난을 안타까워했다. 작품 고료를 받게 하려고, 책을 내려고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애를 썼다. “남들이야 무슨 말을 하든지 저는 선생님의 작품을 참으로 귀하고 값있는 것으로 아끼고 싶습니다.”(1973.2.14) “거기 일직교회는 햇볕이 앉을 곳도 없었던 것 같은데 얼마나 추울까요. 약을 계속해서 잡수셔야 할 터인데 걱정입니다. 어디 돈을 빌려서라도 약을 잡수시면 제가 가서 갚겠습니다.”(1979.11.19) “남들은 권 선생님의 아픈 몸을 속속들이는 모릅니다. 부디 음식을 충분히 잡수시고 무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1988.1.31)

이런 저런 사정으로 한동안 못 보면 서로 그리워했다. 때로는 기약 없이 서로를 기다렸다. 이오덕이 삼십리 길을 걸어 하루에 두 번이나 일직교회로 찾아갔다가 엇갈려 못 만나고 온 날도 있다. 권정생은 이오덕이 안동에 올 때면 혹시 만날까 싶어 버스 정류소에서 서성대고, 개 짖는 소리만 나면 문 밖을 내다보며 기다리기도 했다.

이오덕이 권정생에게 보낸 편지(1973.2.14) 사진 제공 양철북출판사 2015-04-29(한국일보)/2015-05-01(한국일보)
이오덕이 권정생에게 보낸 편지(1973.2.14) 사진 제공 양철북출판사 2015-04-29(한국일보)/2015-05-01(한국일보)

권정생이 이오덕에게 보낸 편지(1982.9.23) 사진 제공 양철북출판사 /2015-04-29(한국일보)/2015-05-01(한국일보)
권정생이 이오덕에게 보낸 편지(1982.9.23) 사진 제공 양철북출판사 /2015-04-29(한국일보)/2015-05-01(한국일보)

편지에는 두 사람의 소소한 일상은 물론이고 어린이문학을 대하는 깊은 사랑, 작고 약한 것들을 향한 연민, 세상 살아가는 도리에 대한 다짐, 어지러운 사회를 염려하고 비판하는 올곧은 마음도 고스란히 들어 있다. 권정생은 이렇게 썼다.

“나 자신이 어린이가 되어 어린이와 함께 살다 죽겠습니다. 하늘을 쳐다볼 수 있는 떳떳함만 지녔다면, 병신이라도 좋겠습니다. 양복을 입지 못해도, 장가를 가지 못해도, 친구가 없어도, 세끼 보리밥을 먹고 살아도, 나는, 나는 종달새처럼 노래하겠습니다.”(권정생, 1973.2.8)

“병든 사람은 병든 사람만이 위로해 줄 수 있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만이 도와줄 수 있답니다. 백 번 죽었다 살아난대도, 저는 역시 가난하게 살면서 가난한 아이들 곁에 있고 싶습니다. 이대로 죽으라면 죽겠습니다.”(1974.4.22)

“어린이를 미숙하고 유치한 존재로 보고 있듯이 아동문학을 그렇게 가볍게 취급하고 있으니 주목할 만한 작품이 나오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한 편의 동화를 빚어내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버릴 수 이는 뜨거운 작가가 나와야만이, 아동문학이 구원을 받고 또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1981.8.26)

“어쨌든 저는 앞으로도 슬픈 동화만 쓰겠습니다. 눈물이 없다면 이 세상 살아갈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산다는 것은 눈물투성이입니다. 인간은 한순간도 죄짓지 않고는 목숨이 유지되지 않는데, 어떻게 행복하고 즐거울 수 있겠습니까? 내가 한 번 웃었을 때, 내 주위의 수많은 목숨이 희생당하고 있었고, 내가 한 번 만족했을 때, 주위의 사물이 뒤틀려 버리고 말았던 것을 어떻게 지나쳐 버릴 수 있겠습니까? 결국 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는 것도 가증할지 모르지만 울 수도 없다면 죽어야지요.”(1985.10.19)

이오덕은 이렇게 썼다.

“다만 작가적 양심으로 글을 씀으로써 모든 불순한 것들에 저항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디 좋은 동화를 계속 쓰시기 바랍니다.”(1977.1.14)

“이 세상에 악이 승하도록 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장자같이 살아가는 것은 결과적으로 도피입니다. 우리는 루쉰을 배워야 합니다.”(1979.7.6)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1980년 봄과 여름에 권정생이 쓴 편지에는 사회의식이 도드라진다. “요사이 라디오 듣고 있으면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어지러운 것 같아요. 조용한 것보다는 좋다고 봅니다. 젊은 학생들의 저항의식이 계속 살아서 움직여야만 국가는 병들지 않을 것입니다.”(1980.5.13) (‘국민총화’라는 구호를 넌즈시 비판하며) “하느님 나라는 절대 하나 되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일만 송이의 꽃이 각각 그 빛깔과 모양이 다른 꽃들이 만발하여 조화를 이루는 나라입니다. 꽃의 크기가 다르고 모양이 다르고 빛깔이 달라도 그 가치만은 우열이 없는 나라입니다.”(1980.7.24)

이 책에 실린 편지들은 어느 한 구절도 허투루 넘길 수 없는 진실과 감동을 담고 있다. 입으로만 떠드는 빈말이 아니고 몸으로 겪고 마음으로 길러서 온 정성으로 써 내려간 글이이라 더할 수 없이 지극하다. 책 말미에는 이오덕이 죽음 직전에 권정생을 생각하며 쓴 시, 권정생이 최후의 고통과 싸우며 “용감하게 죽겠다”고 쓴 유언장이 붙어 있다. 마지막 7쪽을 차지한 이것만 읽어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세상은 이렇게 사는 거라고, 온몸과 온마음으로 보여준 두 사람이 새삼 그리워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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