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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 “새 소설의 유일한 주체는 사랑 그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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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 “새 소설의 유일한 주체는 사랑 그 자체”

입력
2017.03.0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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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인간, 구원과 초월, 원죄와 죄의식 등 심원한 주제에 천착한 작가 이승우는 신작 '사랑의 생애'에서 인간의 가장 내밀하고 원초적인 주제 사랑을 꺼내들었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신과 인간, 구원과 초월, 원죄와 죄의식 등 심원한 주제에 천착한 작가 이승우는 신작 '사랑의 생애'에서 인간의 가장 내밀하고 원초적인 주제 사랑을 꺼내들었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진정으로 삶을 살지 않는 자가 삶이 무엇인지 묻는다. 참으로 사랑하지 않는 자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을 하고’ 사랑을 하는 것이다. 정의 내리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그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사랑에 관한 화자의 단상과 주인공들의 연애가 씨줄 날줄로 엮인다. 숨을 멎게 하는 화자의 밀도 높은 사유와 그 사유를 풀어내는 솜씨는 막장에 가까운 연애사를 예술의 수준으로 승격시키며 소설이 ‘언어 예술’임을 새삼 증명한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떠올리게 하는 이 소설의 제목은 ‘사랑의 생애’(예담). 기독교적 색채를 배경으로 인간의 성과 속을 특유의 관념어로 빚어낸 이승우가 2012년 ‘지상의 노래’ 이후 5년 만에 낸 신작 장편이다.

“관념의 토르소”(문학평론가 김윤식)로 불린 그는 1981년 데뷔 후 30년간 독자층을 서서히 넓힌 대기만성형 작가로 꼽힌다. 프랑스 소설가 르 클레지오가 ‘한국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면 가장 가능성 높은 작가’로 꼽으며 보다 대중적으로 알려졌다. 3일 한국일보사에서 만난 이승우는 “평소 사랑에 관해 작성해 둔 메모를 활용해 에세이 같은 소설을 써 보려 했다. 에피소드는 이 단상을 담는 최소한의 용기로만 썼다”고 말했다.

-오랜만의 장편 발표다.

“그 사이 단편을 많이 썼다. 2014년 단편집이 하나 나왔고 올 여름쯤 또 한 권 나온다. 사랑에 관한 메모를 엮어 에세이 쓰는 기분으로, 최소한의 서사 얼개에 엮어 본 작품이다.”

-원래 메모를 많이 하는 편인가?

“오래 전부터 메모장 갖고 다니며 습관처럼 메모해 (그걸 보며) 소설을 썼는데, 그동안 모은 사랑에 관한 메모가 꽤 되더라. 요즘은 휴대폰 노트기능을 쓴다.”

-펴낸 출판사도 의외다(예담은 만화 ‘미생’을 출간한 위즈덤하우스의 문학브랜드다).

“전작 ‘지상의 노래’를 내고 북콘서트를 열었는데 진행자로 영화평론가 이동진씨가 나왔다. 진행을 수락하는 조건이 (위즈덤하우스가 만드는) 팟캐스트 ‘빨간 책방’ 출연이었다. 출연하는 날 예담 편집자들이 왔고 절판된 소설을 복간하자는 제안을 했다. 재작년 ‘에리직톤의 초상’, ‘독’이 나왔고, 신작 장편을 달라기에 이 소설을 생각했다.”

-예담은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천명관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 같은, 한 재미 하는 작가들의 장편소설을 펴냈다. 이들에게 (상업적) 위기감을 느낀 건가?

“내 책이 더 나갈 거라는 생각은 없지만 일단! 맘에 있던 소재를 이 기회에 쓰면 좋겠단 생각은 들더라. 2,3년 전부터 시작해 작년에 집중, 몰아서 썼다. 소제목 하나 하나가 메모에 쓴 단상을 바탕으로 만든 거다. 그 단상을 쓰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낸 격이다. 인물이 중요한 소설은 아니다. 사랑 자체가 중요하다. 사랑이 하나의 인물이자 유일한 주체다.”

-1장 단상부터 시작해 2장에서 본격적인 에피소드가 나온다. 단순한 막장 연애사에 밀도 높은 사유를 켜켜이 쌓은 방식이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 가벼움’을 연상시킨다.

“워낙 쿤데라 소설을 좋아한다. 내용은 막장인데 화자의 서술에서 삶의 이면을 발견하게 된다. 일부러 염두에 둔 건 아니지만, 영향을 받은 건 사실이다. 내 소설의 기원은 이청준 선생 작품이다. 이야기를 인물에 녹여내는 거고 화자가 따로 주절주절 늘여놓는 걸 피하는 편인데, 쿤데라는 그걸 자유롭게 한다. 이 자유로움이 부럽더라. 작가가 독립된 제3의 인물처럼 자기 말을 하는 걸 무의식 중에 시도한 게 전작 ‘지상의 노래’다. 그때부터 에세이적 글쓰기라고 할까, 우리나라에 없는 전통을 구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이 작품은 보다 본격적으로 나온 것이고.”

소설 속 연애사는 단출하다. 형배는 자신을 짝사랑해 고백까지 했지만 “나는 자격이 없다”는, ‘자기 비하의 트릭’으로 물리쳤던 대학 후배 선희를 2년 10개월 만에 우연히 만나 단박에 사랑에 빠진다. 선희는 그 사이 새로운 연인 영석을 만나고 있다. 4세 때 부모를 다 잃은 영석은 선희에게 강한 모성애를 느끼며 “나무줄기를 감고 오르는 넝쿨식물처럼” 죽기 살기로 매달린다. 그런 그에게 선희가 끌린 건 “그 남자의 약함, 보잘것없음” 때문이다. 삼각관계가 된 이 셋의 이야기에 형배의 고교 동창, 준호의 사랑 이야기가 끼어든다. ‘자유연애주의자’인 그는 “결혼해야 키스할 수 있다”는, 열성 기독교 신도 민영을 만나 “키스를 위해” 결혼하기로 결정하며 가장 강한 상대, 신(神)과 맞서기 시작한다.

“자격을 갖추고 있어서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와 당신에게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승우는 “‘사랑의 생애’ 속 유일한 주체는 사랑 그 자체”라고 말했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자격을 갖추고 있어서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와 당신에게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승우는 “‘사랑의 생애’ 속 유일한 주체는 사랑 그 자체”라고 말했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소설 속 인물이라 할 사람은 형배, 선희, 영석, 준호, 민영 딱 5명이다. 인물마다 상징성을 갖고 있을 텐데.

“처음에는 주인공 남자 하나(형배)에 사랑과 관련된 모든 패턴을 집어넣으려고 했다. 불가능하더라. 사랑은 사랑이 사람 안에 들어와서 하게 되지만, 숙주로서 그 사람이 가진 취향, 유전자, 환경에 따라서 사랑의 방식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런 맥락에서 사랑의 몇 개 패턴을 만들다 보니까 그런 인물이 나왔다. (바람둥이) 준호, (애정결핍자) 영석을 양쪽 유형으로 뒀고 가장 평균적인 인물은 형배다. 소설에도 썼지만 이념이 달라도 종교가 달라도 사랑할 수 있는데 사랑의 패턴이 다르면 사랑하기 어렵다는 생각이다.”

-쿤데라의 연애소설은 상당수가 작가 본인 얘기라는 말이 있다. 그 점에서 신작이 ‘경험의 벽’을 넘지 못한 게 아닐까. 선희, 민영을 사랑에 빠진 보편적인 여성 인물로 보나?

“민영은 종교 같은 다른 신념에 사로잡힌 사람을 사랑하기가 어렵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만든, 아주 독특한 캐릭터다. 선희는….제가 여자를 잘 모르는 면은 있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인데, 남자는 자신이 얼마나 결핍 많고, 사랑 자체에 불순물이 많은지를 안다. 그 남자가 사랑하는 건 허물 없는, 완전한 사람이다. 그간 내 소설에서 여성은 완전에 가까운 이상적인 인물이었던 것 같다. 이상적인 인물을 만들 때 남성보다 여성을 택한다. 남자는 한가지에만 매몰되는데 여자는 여러 영역을 아우르며 사람을 보듬는 식이다. 이 소설에서도 선희가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나오고, 남자들은 사랑에 치여서 어떻게 할 줄 모르는 자들로 나온다.”

-소설을 읽다 보면 작가 본인의 바람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작품에 들어갈 때가 있다. 대표적인 게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속 중년 남자들의 연애 패턴이다. 50대 중년 남자가 20~30대 젊은 여자와 가볍게 연애하고, 중년의 벗겨진 머리가 성적 매력으로 그려지는 장면 같은 거다. 여성 독자들은 이 부분, ‘하루키의 판타지’로 읽는다. 이 소설에도 갓 소설가로 등단한 서른살 선희가 지방 문학관 과장인 마흔살 영석을 “약함, 보잘것없음” 때문에 좋아하는 설정이 나온다.

“사실 나이 차이를 더 내고 싶었다(웃음). 내가 원하는 사랑 유형이 영석에게 약간 들어가 있는 거 같다. 모성애적인 부분에 끌리는데, 내 초기 소설에 특히 그런 면이 있다. 모든 걸 받아들이고 희생하고 사랑의 이름으로 용납하는, 내가 원하는 여성상을 내 작품에 많이 넣는다. 왜곡일 수도 있는데, 내 경험과 관련된 결핍에 모성애적인 게 있다. 어머니의 사랑을 모르고 자라서 실체를 모르는데, 어릴 때 어머니 은혜에 대해서 글 쓰고 상 받곤 했다. 돌아보면 가증스럽다. 그런 경험을 영석에게 많이 부여한 게 아닐까. 현실에서 결코 강요하진 않는다(웃음). 소설 속 제 관심은 남성의 사랑 패턴이었고 여성, 선희는 사랑의 대상이었다.”

-집필 기간 문단에서 여성 혐오가 이슈가 됐다.

“전혀 생각 못했는데 질문에 답하면서 요즘 문단에서 말하는 여혐을 논할 때 내 소설도 언급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여성을 남성보다 높였는데, 그렇게 언급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작품 쓸 때 이 부분에 대해 자기검열을 하게 되나.

“지금까진 없었는데 요즘 ‘어떻게 써야 하나?’하는 불편함은 있다. 이런 유형의 인간이 있어서 이런 유형의 인간을 보여주는, 예컨대 깡패가 나오는 부분에서 깡패답게 그리는 거다. 소설은 망가진 인물은 망가진 대로 드러내면서 주제를 드러내는 데, 자연스러움이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거다. 근본적으로 공감한다. 지금까지 그 문제를 간과해온 건 사실이니까. 그런데 성경을 읽어도 (지금의 기준에서 여성혐오라 할 부분이) 나온다. 간음하는 얘기, 살인하는 얘기, 근친상간까지 잔뜩 나오는데 추악한 책이 아니지 않나. 2,000년 전 가부장제 사회의 얘기를 시대를 무시하고 21세기 기준으로 읽는 독자는 없다. 그런 걸 염두에 두고 읽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 비하되는 표현을 하나도 못하면 비하되는 현실을 드러내질 못하지 않나. 문학에는 악마도 천사도 있어야 한다.”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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