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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백제 유적과 군함섬

입력
2015.05.22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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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구 전 총리가 성완종 리스트 파문으로 옷을 벗기 전 “‘구다라나이’는 ‘별 것 아니다’라는 의미로, 어원을 보면 백제 물건이 아니어서 별 게 아니란 뜻이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일본 문화재청이 홈페이지에 삼국시대 출토 유물을 ‘임나’로 표기한 데 대한 반박 기자회견에서였다. 이는 일본어 구다라나이(くだらない)가 백제의 일본식 명칭 ‘구다라(くだら)’와 부정의 접미어 ‘나이(ない)’의 합성어에서 기인했다는 학설이 토대다. 일본 학계는 이 주장을 정설로 받아들이지 않는 분위기지만 이런 학설의 존재만으로도 일본에 끼친 백제의 영향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백제가 일본 고대 문화에 기여한 흔적은 셀 수 없이 많다. 서기 552년 일본에 처음 불교 문화를 전파했고, 588년 일본 최초의 사찰인 아스카데라 창건을 도왔다. 수년 뒤 건립된 시텐노지는 백제인 기술자 유중광의 힘이 컸다. 유중광이 곤고(金剛)라는 자신의 일본 성을 따 세운 곤고구미(金剛組)는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으로 건재하다.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왕족과 귀족들이 일본 지배층의 한 축을 이루기도 했다. 아키히토(明人) 일왕도 수시로 자신의 모계 혈통이 백제계임을 언급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심사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가 최근 충남 부여, 공주, 익산 등에 산재한 백제역사문화유적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권고했다. 송산리 고분군, 부소산성, 정림사지, 미륵사지 등 백제 유적의 진가를 인정받은 것이다. 일본 고대문화의 원류인 백제 유적이 한일수교 50주년인 내달에 맞춰 세계문화유산으로 결정되는 것이니, 더욱 값지다.

세계유산 등재소식이 나오면 잔칫집처럼 축하 분위기가 무르익어야 하건만, 올해는 유독 분위기가 나지 않는다. 이웃 일본이 신청한 ‘규슈ㆍ야마구치 및 인근 메이지혁명 근대 산업시설’이 백제유적과 나란히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서양 기술이 일본문화와 융합해 산업국가로 형성한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우리 정부는 이들 시설 중 군함섬이라는 별명을 가진 하시마 탄광, 나가사키 조선소 등에서 4,700여명의 조선인이 강제징용을 당한 사실을 근거로 등재에 반대했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긍정의 유산이 ‘부(負)의 유산’에 밀려 관심 밖으로 밀려난 형국이니 허탈감은 더하다.

급기야 박근혜 대통령이 20일 이리나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을 만나 “세계유산은 국가간 갈등을 조장해서는 안 된다”며 반대의사를 표했다. 최종문 유네스코 협력대표도 22일 일본 관계자를 만나는 등 막판 뒤집기에 안간힘이다. 하지만 이미 등재 권고된 내용이 막판에 바뀐 사례는 거의 없다. 한국이 그간 유네스코에 기부한 돈이나 영향력이 일본에 미치지 못하니 결론은 이미 나있는 셈이다. 일본은 한국의 이런 움직임을 “정치적 주장”이라고 몰아세우고 있다.

뒤늦게 차선책으로 강제 징용 현장에 이런 사실을 알리는 표지판을 설치하는 안이 제시되고 있지만, 처음부터 우리 정부가 내세웠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세계 각국이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속내는 유네스코라는 브랜드에 기댄 관광산업 활성화 측면이 크다. 유네스코조차 홈페이지에 “(세계유산 지정으로) 국제적인 지명도가 높아지면서 관광객 증가와 고용기회, 수입 증가 등을 기대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지역 세계유산 지정을 처음 추진한 시민단체 ‘군함섬을 세계유산으로 하는 모임’의 의도와도 부합한다. 일본으로선 표지판 하나로 규슈 지역을 가장 많이 찾는 한국인 관광객을 확보하는 경제적 이익과 함께 과거사 참회 모양새마저 얻게 되니 일석이조다.

최종 확정까지 남은 기간 한일 양국이 원만한 대화로 슬기로운 해결책을 내놓길 바란다. 과거 백제와 일본이 좋은 관계 유지를 위해 어떤 정책을 펼쳤는지도 참고할 만하다. 이번 사안이 가뜩이나 험악한 한일 갈등 문제를 푸는 단초로 발전되기를 기대한다.

한창만 논설위원 cm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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