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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켓 빼앗길라… 화장실도 눈치보며 가는 1인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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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켓 빼앗길라… 화장실도 눈치보며 가는 1인시위

입력
2016.03.2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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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황산테러 사건으로 숨진 김태완군의 어미니 박정숙씨가 지난 해 7월 대구지검 앞에서 살인죄 공소시효 폐지를 요구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대구 황산테러 사건으로 숨진 김태완군의 어미니 박정숙씨가 지난 해 7월 대구지검 앞에서 살인죄 공소시효 폐지를 요구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달 말부터 서울 남대문로 인도에서 남양유업의 횡포에 항의하며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장미화(67ㆍ여)씨는 이달 3일 황당한 경험을 했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관할인 중구청에서 현수막과 피켓 등 시위용품을 모두 가져간 것. 처음도 아니다. 얼마 전에도 자리를 비운 지 10분이 채 안돼 시위용품이 사라졌다. 중구청을 찾아 문의하자 구청 측은 “규정대로 했다”는 답변만 반복했고 일부 용품은 돌려주지 않았다. 장씨는 27일 “이쯤 되니 일부러 시위자가 없는 틈을 노려 물품을 수거하는 게 아닌지 의심이 든다”며 “1인 시위자는 화장실 갈 때도 바리바리 싸서 들고 다니라는 말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회적 약자들의 마지막 의사표현 수단인 1인 시위마저 제한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특히 4ㆍ13 총선을 앞두고 정치적 목적이 아닌 ‘생계형 시위’까지 옥죄고 있어 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과도하게 침해한다는 비판이 거세다.

법의 허점을 이용한 시위물품 강제 수거가 최근 두드러진 현상이다. 부당해고를 이유로 청주시청 앞에서 1인 시위 중인 김현석(32)씨도 다섯 차례나 시위 물품을 수거 당했다. 그는 “시청에 아무리 물어봐도 ‘자리를 비운 지 몇 분이 지나야 수거 대상이 되는지’ 등 정확한 위반 사실을 알려주지 않아 답답하기만 하다”고 토로했다. 시청 측은 “시위자가 현장에 없을 경우 실질적인 시위가 이뤄지지 않는 것으로 판단, 현수막과 피켓을 치운 것”이라고 설명했다. 옥외광고물관리법 적용 배제(8조) 조항을 근거로 수거가 정당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해당 조항에는 ‘적법한 노동ㆍ정치활동에 사용된 광고물만 철거 대상에서 제외한다’고 명시돼 있을 뿐, 시위자 부재 시 철거 기준은 나와 있지 않다. 지자체의 자의적 판단으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는 셈이다.

언제 쫓겨날지 모르다 보니 1인 시위에 추가 인력이나 차량이 동원되는 엉뚱한 상황이 생긴다. 이달 초 1인 시위를 계획한 월드피스자유연합 관계자는 “자리를 비울 수 없다는 불안감에 2명 이상이 교대로 시위를 한다”고 했고, 국경없는인권 관계자 역시 “차량을 근처에 주차한 뒤 시위자가 없을 때에는 차 안에서 현장을 보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경찰이 1인 시위에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경우도 있다. 경찰은 지난해 12월 시민단체 장그래운동본부가 국회 정문 앞 인도에서 20~30m 간격으로 진행한 1인 시위에 집시법 위반을 적용했다. 형태는 1인 시위라도 서로 아는 사람들이 같은 목적으로 모였기 때문에 집회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명확한 간격 기준은 없는 상태다. 3년 전부터 서울 경복궁역 인근에서 여성인권 보장 1인 시위를 해 온 원모(29ㆍ여)씨는 “작년까지만 해도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았는데 총선이 다가오면서 피켓만 들어도 경찰이 에워싸고 소속 단체를 캐묻는 등 감시가 심해졌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경찰청 관계자는 “1인 시위의 형태만 따 온 불법 집회가 많아지다 보니 대응 수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고 해명했다.

인권 전문가들은 공권력이 집시법을 입맛대로 재단해 규제를 남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송아람 변호사는 “1인 시위는 힘 없는 개인이 억울한 사연이나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라며 “집시법으로 규율할 수 없는 1인 시위까지 형식적 조건을 만들어 표현 수단을 가로채는 건 공권력이 저지르는 절도에 가깝다”고 꼬집었다.

맹하경기자 hkm0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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