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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374, 86-1360… 그들은 숫자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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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374, 86-1360… 그들은 숫자일 뿐이었다

입력
2015.07.03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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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들은 4월 28일 국회 앞에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삭발식을 했다. 6월 24일까지 58일간 이어진 농성의 시작이었다. 연합뉴스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들은 4월 28일 국회 앞에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삭발식을 했다. 6월 24일까지 58일간 이어진 농성의 시작이었다. 연합뉴스

지옥보다 더한 생지옥이 사회복지시설이라는 간판을 달고 국고 지원을 받아가며 12년간 버젓이 운영됐다. 1975년부터 87년까지 부산에서 부랑인 수용시설로 운영된 형제복지원이다. 형제복지원 피해사건은 박정희 정권 때인 1975년 내무부 훈령 410호에 근거해 부랑인을 선도한다는 명목으로 장애인, 고아 뿐 아니라 일반 시민까지 불법으로 납치ㆍ감금해 강제노역, 구타, 성폭행, 암매장한 사건이다. 수용자가 최대 3,146명에 달했던 그곳에서 12년 간 공식 사망자 숫자만 513명에 이른다. 87년 울주군 작업장에서 일어난 원생 폭행 치사 사건을 계기로 정체가 드러났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제대로 된 책임자 처벌과 보상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생존자들은 여전히 정신적ㆍ육제적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숫자가 된 사람들’은 ‘한국판 아우슈비츠’로 불리는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의 피맺힌 목소리를 담은 구술기록집이다. 피해 생존자 11명의 이야기를 인권기록 활동가들이 정리했다.

'숫자가 된 사람들' 형제복지원구술프로젝트팀 지음 오월의봄 발행ㆍ344쪽ㆍ1만5,000원
'숫자가 된 사람들' 형제복지원구술프로젝트팀 지음 오월의봄 발행ㆍ344쪽ㆍ1만5,000원

생존자들의 증언 내용은 믿기 힘들 만큼 참혹하다. 사람이 사람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다. 그곳에서 수용자들은 번호로 매겨졌다. 몇 년도에 몇 번째로 들어왔느냐에 따라 78-374, 82-2222, 86-1360 식으로. 87년 당시 형제복지원은 연간 20억원 이상 국고 보조를 받았는데, 그 액수의 기준이 수용자 머릿수였다. 원장 박인근에게 그 숫자는 두당 얼마의 재산이었고, 그들을 검속해 형제복지원에 넘긴 경찰에게는 두당 얼마씩의 짭짤한 근무 평점이었다.

발생한 지 30년이 넘도록 왜 여태 해결이 안 되고 있는지 생각할수록 갑갑하고 화가 나게 만드는 책이기도 하다. 87년 사건으로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은 특수감금죄는 무죄, 다만 횡령죄로 2년 반 감옥을 살고 나오는 데 그쳤다. 그렇게 묻혀 버렸던 피해자들의 이야기는 2012년 생존자 한종선씨가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며 증언집 ‘살아남은 아이’를 발간하면서 다시 세상에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새정치민주연합 진선미 의원은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발의했다. 특별법 제정까지는 갈 길이 멀다. 안행위-법사위를 거쳐 본회의를 통과해야 하는데, 발의 1년 만인 3일에야 입법을 위한 첫 공청회가 열렸다.

형제복지원은 국가의 위탁으로 운영된 지옥이었다. 따라서 거기서 자행된 인권 유린은 국가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무고한 이들을 부랑인으로 몰아 마구잡이로 납치해서 짓밟은 근거가 박정희 정권의 내무부 훈령이었고, 박정희의 뒤를 이은 독재자 전두환 역시 총리에게 서한을 보내 부랑인 단속 강화를 지시했다. 부산시와 언론도 이 만행에 부역했다. 부산시에서 시찰했지만 매번 문제 없이 넘어갔고 언론은 박인근을 부랑인을 돌보는 사회사업가로 칭송했다. 박은 87년 사건으로 수감됐다 나온 뒤에도 형제복지원 재단 이름을 바꿔 계속 운영하면서 자산을 불렸다. 2000년대 들어서도 일부 기독교 매체는 인터뷰 기사에서 그의 변명을 전하며 옹호했다. 지난해 형제복지원 관련 특별법이 발의된 뒤로 여론이 나빠지자 박일근 일가는 재단을 매각해 최소 40억원 이상을 번 것으로 알려졌다.

오미환선임기자 mh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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