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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불평등을 없애려면... 정직한 노동에 대가를” 석학의 합리적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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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불평등을 없애려면... 정직한 노동에 대가를” 석학의 합리적 제안

입력
2018.03.16 04:4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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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스티글리츠는 '경제 규칙 다시 쓰기'에서 오늘날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다양한 정책적 처방을 제안한다. 열린책들 제공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경제 규칙 다시 쓰기'에서 오늘날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다양한 정책적 처방을 제안한다. 열린책들 제공

‘경제 규칙 다시 쓰기’는 노벨상 수상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가 루스벨트연구소와 함께 작업한 정책 제안서다. 1부 ‘현재의 규칙’에서는 간단한 현실진단을, 2부 ‘다시 쓴 규칙’에서는 구체적 정책 대안을 제시했다. 원래 소수의 정책 입안자들을 위한 보고서였던 만큼 설명이 길지 않은 짧은 팸플릿 같은 구성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불평등 문제를 파고들지만 급진적이라기보다 합리적이고 중도적이라는 데 있다. 스스로 진보적이라 생각하는 이들은 최근 나온 ‘균형재정은 틀렸다’(책담)와 같은 주장에 열광하는 경향이 있다. 화폐와 시장의 뿌리는 권력이기에, 권력이 안정적이라면 화폐를 막 찍어내는 방식으로 재정지출을 늘려도 문제될 것이 없으며, 이걸 막는 자는 인플레이션으로 자산가치 하락을 감수해야 하는 기득권자들이라는 접근이다. 힐러리 클린턴과 민주당 경선에서 경쟁했던 버니 샌더스 같은 진보인사들이 좋아하는 논리다. 정부가 돈 좀 쓰면 국가재정 거덜날 것처럼 호들갑 떨어대는 건전재정론자들에게 지칠 대로 지친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 반작용 때문에 지나치게 극단화된 경향이 있다. 스티글리츠는 때에 따라 과감한 재정지출이 필요하지만, 그래도 재정균형이 중요하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1부는 우리가 숱하게 들었던 얘기를 담고 있다. ‘세계화로 인한 불평등 심화’. 저자는 대신 어쩔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도 뭔가는 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적 불평등이 정치적 불평등을 낳고, 정치적 불평등이 다시 경제적 불평등을 강화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걸음 더 나가 세계화는 “바닥을 향한 경주를 부추겨 규범을 떨어뜨리는데” 악용되는 경향이 있다고도 한다. 세계화 핑계 삼아 슬쩍 숟가락 올리는 행태가 만연해 있다는 지적이다. 이 악순환을 끊으려면 정책 방향은 단 한가지, 돈 놓고 돈 먹기 말고 정직한 노동에 대가를 지급토록 하라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화두 불평등을 빙산에 비유한 그림. 기술발달과 세계화 때문에 불평등은 어쩔 수 없다는 이들에 맞서 스티글리치는 빙산의 중간 부분 '경제의 틀을 형성하는 규칙들'은 우리가 조정할 수 있다고 맞선다. 열린책들 제공
우리 시대의 화두 불평등을 빙산에 비유한 그림. 기술발달과 세계화 때문에 불평등은 어쩔 수 없다는 이들에 맞서 스티글리치는 빙산의 중간 부분 '경제의 틀을 형성하는 규칙들'은 우리가 조정할 수 있다고 맞선다. 열린책들 제공

구체적 제안들을 보면 이렇다.

재정지출 못지 않게 조세지출을 재조정해야 한다. 재정지출이야 ‘복지 좋아하다 국가재정 거덜난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마이크를 너무 오래 잡은 바람에 너무 익숙하다. 하지만 좁게는 정책상 목표를 위한 세제상의 각종 혜택을, 넓게는 감세까지 포함하는 조세지출은 생소한 표현이다. 가령 법인세 감면은, 걷어야 할 법인세를 줄여줌으로써 사실상 기업들에게 세금으로 보조금을 지원하겠다는 것인데, 이 때는 생산을 북돋으니 괜찮다며 국가재정 문제를 슬쩍 덮어버린다.

스티글리츠는 바로 이 지점을 비판한다. 생산을 북돋는다고 자본에 대한 조세지출을 늘렸는데, 이 돈이 생산을 자극하는 ‘자본’이 되지 않고 투기장을 돌아다니는 ‘부’가 되어버렸다는 얘기다. 기업들은 막대한 돈을 깔고 앉아 있고, 자본시장 활성화라는 이름 아래 자본투자에 대한 각종 세금혜택은 거품만 만들 뿐이다. 저자는 부동산 거품을 대표적인 ‘착취형 지대’라 못 박는다. 조세지출이 생산에 자극을 주지 못한다면 차라리 정직한 노동에 인센티브를 줄 수 있도록 체계를 개편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시기심에서 비롯되는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시스템이 공동의 번영을 창출하지 못하면 번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주식 투자, 미술품 투자 등을 통해 스스로는 많은 돈을 벌었음에도 “금리생활자의 안락사”만이 자본주의의 미래를 담보한다 믿었던 경제학자 케인스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금융권의 대마불사(大馬不死) 신화를 없애기 위해서는 은행들의 자기자본충당비율을 은행의 규모에 따라 차등화해야 한다. 자기자본충당비율 기준을 만들 때 ‘시스템 전체에 중요한 금융기관들’에겐 은행 규모에 따라 가중치를 부여하자는 것이다. 동시에 규모가 큰 은행일 경우 파산하면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에 대한 ‘정리 의향서’를 미리 만들어두도록 한다. 사람으로 치자면 유언장을 미리 만들어 공증을 받아두라는 얘기다.

경제 규칙 다시 쓰기

조지프 스티글리츠 지음ㆍ김홍식 옮김

열린책들 발행ㆍ368쪽ㆍ1만5,000원

늘 논란이 되는 법인세에 대해서도 임금과 연계하는 방안을 생각해볼 수 있다. 노동자 보수의 중앙값(혹은 최저값)과 최고경영자 보수간 비율에 맞춰 법인세율을 정하는 것이다. 더 평등한 회사일수록, 다시 말해 회사의 수익을 직원들에게 더 열심히 나눠주는 회사일수록 법인세를 덜 내게 해주는 방식이다. 회사의 수익을 직원들과 공유하는데 인색한 회사는 법인세라도 왕창 내라는 얘기다. 주주자본주의 어쩌면서 주식시장에 돈을 푸는 것보다 낫다.

변화된 노동 형태를 감안해 노동자 권한 또한 강화해야 한다. 예전의 노동법은 대형 공장에서 뻔히 드러나는 고용ㆍ피고용 관계에 따라 일하는 노동자들을 상정하고 만들어졌다. 이제 외주, 하도급 등을 통한 노동 분할이 보편적이다. 이에 맞춰 노동자들을 보호하려면 전반적인 구조와 맥락을 함께 봐야 한다. 가령 월마트에 대해 월마트가 직접 고용한 노동자뿐 아니라 월마트에 납품하는 공급망에 포함되는 노동자들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라고 요구한 캘리포니아 주법원의 판례를 참고해볼 법하다. 이외에도 여러 정책 제안을 내놓는다.

저자는 미국이 세계경제의 주요 리더인 만큼 이러한 정책들이 미국의 국내적 조치일뿐더러, 전 세계에 전파될 수 있는 모델임을 강조한다. 그런데 아뿔사. 이 책 출간연도는 2016년이다. 당연히 힐러리를 위한 책이었다. 지금은 당연히 무용지물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라면 참고해볼 만한 것들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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