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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美 전략자산에 박수만 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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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美 전략자산에 박수만 칠 건가

입력
2017.02.2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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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북한의 5차 핵실험 직후 미국의 전략폭격기 B-1B가 경기도 오산공군기지 상공에서 F-15K 전투기 4대의 호위를 받으며 비행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지난해 9월 북한의 5차 핵실험 직후 미국의 전략폭격기 B-1B가 경기도 오산공군기지 상공에서 F-15K 전투기 4대의 호위를 받으며 비행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아빠, 로보트 태권브이는 키가 얼만해?”

초등학교 2학년 막내 녀석이 소파에 가방을 내팽개치더니 대뜸 묻는다. 학교에서 본 만화영화가 영 미덥지 않았나 보다. 태권브이가 투박한 발차기로 악당을 무찌르는 모습이 생소했던 모양이다.

“엄청 크겠지, 우리 아파트보다 클걸.” 별 생각 없이 둘러댔다. 막내는 골똘히 생각하더니 “우와 진짜 크겠네, 아 그래서 잘 싸우는구나”라며 눈이 휘둥그래진다. 태권브이가 ‘센 놈’이라는 걸 이제야 알겠다는 표정이다.

어릴 적 힘에 대한 잣대는 이런 식이었다. 크고 세면 최고로 보였다. 으슥한 골목길에 껌을 씹는 중학생이 어슬렁거려도 옆집 대학생 형이 담 너머로 헛기침만 하면 별 탈없이 지나가곤 했으니까. 악당이 고약할수록 응징하려면 더 센 놈이 필요할 터. 하물며 상대가 북한이라면 압도적인 ‘힘의 우위’로 아예 손발을 묶어버리는 게 상책일 듯싶다.

덕분에 요즘 각광을 받는 게 미국의 전략자산이다. 북한 지휘부를 제거하고 주요 시설을 초토화해 전쟁수행 능력을 마비시키는 무기를 말한다. 단번에 북한의 숨통을 끊을 정도의 가공할만한 필살기다.

하도 유명세를 치르다 보니 연예인마냥 제각기 별칭도 있다. 하늘을 나는 요새(B-52장거리폭격기), 죽음의 백조(B-1B전략폭격기), 유령(B-2스텔스폭격기) 등 느와르 영화 제목을 연상케 한다. 지난해 북한의 두 차례 핵실험에 맞서 B-52는 육중한 체구를 뽐내며 한반도 상공을 가로질렀고, B-1B는 한술 더 떠서 두목인양 우리 F-15K전투기 4대를 이끌며 위용을 과시했다. 갈수록 포악해지는 북한 도발에 애태우던 정부는 그제서야 안심하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너무 들떴던 걸까. 전략자산을 붙들려고 욕심을 부리다 스텝이 꼬였다. 지난해 10월 한미 국방장관회담에서 내친 김에 ‘상시 순환 배치’를 관철하려다 체면을 구겼다. 한반도에 교대로(순환), 항상 투입(상시 배치)하면 영구주둔이나 마찬가지다. 북한을 압박할 최고 수위의 카드다. 하지만 미 측의 막판 거부로 합의문에서 빠졌고, 한민구 장관은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전략자산을 보내더라도 볼모로 잡혀선 안 된다는 미국의 속내가 또렷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다급해진 정부는 두 달 후 ‘정례적’ 배치로 한 단계 수위를 낮췄다. 붙박이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또 수시로 투입한다는 모호한 의미다. 그러자 미국이 흔쾌히 동의했다. 지금껏 해오던 방식과 달라진 게 없는 탓이다. 미 폭격기는 괌에서는 두 시간, 주일기지에서는 한 시간이면 한반도에 날아올 수 있다. 정례적 배치라는 표현이 낯간지럽지만 정부는 대단한 성과인양 한껏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전략자산을 우리 뜻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점이 확인되면서 이제는 밥상을 차려 줘도 눈치만 살피는 지경이다. 최근 스텔스구축함 줌월트를 둘러싼 논란은 차라리 촌극에 가깝다. 지난달 해리 해리스 미 태평양사령관이 한반도 배치를 대담하게 제안했는데도 한 장관은 “미 측이 언급은 했지만 공식 제안은 없었다”며 오히려 손사래를 치고 있다. 덥석 물었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엉뚱하게도 전략자산에 대한 기대감은 호들갑으로 번졌다. 이달 초 제임스 매티스 미 국방장관이 전용기 E-4B를 타고 한국에 오자 ‘심판의 날’이라는 E-4B의 별칭이 부각되면서 “북한을 향한 준엄한 경고”라는 과잉해석이 난무했다. 반면 주한미군은 “장관이 늘 타고 오는데 왜 난리지”라며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미국이 내달 시작하는 한미 연합훈련에 전략자산을 대거 보낸다고 한다. 또다시 한반도가 들썩일 조짐이다. 모처럼 센 놈을 등에 업고 정부가 북한을 향해 으스댈 판이다. 하지만 훈련이 끝난 뒤 밀려올 공허함을 어찌할는지. 이제는 환호가 아니라 전략자산이 돌아간 빈 자리를 차분하게 메워나가야 할 때다.

김광수 정치부 기자 rolling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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