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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칼럼] 어떻게 죽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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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칼럼] 어떻게 죽을 것인가

입력
2016.10.0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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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의학은 생명을 연장하고 질병을 공격적으로 치료하는 데 집중해 왔다. 정작 길어진 노년의 삶과 노환 그리고 질병과 사고로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은 누구나 마지막 순간까지 존엄하고 인간답게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윤리학과 철학 그리고 의학을 공부한 뒤 현재 하버드 의과대학교 보건대학 교수이자 여성병원 의사로 활동 중인 아툴 가완디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서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책에서 몇 장면을 조금 길게 소개한다.

“당시 나는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겠다고 고집 피우는) 라자로프의 선택이 잘못됐다고 믿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수술에 따르는 위험 때문이 아니라 수술을 받아도 그가 원하는 삶을 되찾을 확률이 없었기 때문이다. 배변 능력, 활력 등 병이 악화되기 전에 누렸던 생활을 다시 찾을 수 있는 수술이 아니었다. 길고도 끔찍한 죽음을 경험할 위험을 무릅쓰고 그가 추구한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그는 그런 죽음을 맞이했다.” (13쪽)

책에서 예시된 환자 라자로프는 그래도 의식이 있고 말할 수도 있는 상태였다. 스스로 연명치료를 요구했다. 연명치료란 말 그대로 목숨을 연장하도록 도와주는 치료다. 심각한 사고든 질병의 결과이든 산소호흡기와 같은 보조 장비가 없으면 스스로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환자의 맥박을 이어가게 하는 처치를 말하는 것이다.

“사지마비가 오면 24시간 간호, 산소 흡입기, 영양 공급관이 필요해질 것이다. 아버지는 그걸 원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내가 말했다. “절대 안 되지, 그냥 죽는 게 낫다.” 아버지의 대답이었다. 그날 나는 내 평생 가장 어려운 질문들을 아버지에게 던졌다. 커다란 두려움을 안고 하나하나 물었던 기억이 난다. 무엇을 두려워했는지는 모르겠다. 아버지나 어머니의 분노 혹은 우울, 아니면 그런 질문을 함으로써 뭔가 그분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야기를 나눈 후, 우리는 안도감이 들었고 뭔가 명확해졌다는 걸 느꼈다.” (302쪽)

나는 장인과 장모님을 모셨다. 장인은 집에서, 장모님은 종합병원 중환자실의 특별격리실에서. 하필 의료계가 전국적인 동시 파업을 일으켰을 때 뇌졸중을 맞은 장모님은 적시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셨다. 이후 수년간 병원을 전전하셨고 결국에는 수개월 동안이나 중환자실에 격리되어야 했다. 어느 날 의사 선생님이 지나가는 소리처럼 슬쩍 말했다. “저렇게 모시고 있는 게 효도가 아닙니다. 어머니에게도 존엄성이 있습니다. 품위 있게 돌아가실 권리가 있지요.” 내가 사위가 아니라 맏아들이었다면 장모님에 대한 연명치료를 중단했을 것이고, 우리는 차분하게 장모님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연명치료에도 불구하고 신부전으로 죽음은 갑작스럽게 왔고 온 가족은 패닉에 빠졌으며 가엾은 레지던트 선생님은 악다구니를 들어야 했다.

“의학은 아주 작은 영역에 초점을 맞춘다. 의료 전문가들은 마음과 영혼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 신체적인 건강을 복구하는 데 집중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삶이 기울어 가는 마지막 단계에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정할 권리를 의료 전문가들에게 맡겨 버렸다.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질병, 노화, 죽음에 따르는 여러 가지 시련은 의학적인 관심사로 다뤄져 왔다. 인간의 욕구에 대한 깊은 이해보다 기술적인 전문성에 가치를 두는 사람들에게 우리 운명을 맡기는, 일종의 사회공학적인 실험이었다. 그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257쪽)

‘타임’과 ‘프로스텍트’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 중 한 명인 아툴 가완디는 나이 들어 병드는 과정에 적어도 두 가지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나는 삶에 끝이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용기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가 찾아낸 진실을 토대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용기다. 이때 우리는 두려움과 희망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판단해야 한다. 끝까지 질병과 승산 없는 싸움을 벌이며 연명치료에 매달리는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생명 있는 존재가 필연적으로 맞이해야 하는 운명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우리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을지 알게 된다. 그것은 삶에 대한 희망이다.

올해 1월 8일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허용하는 웰다잉(well-dying)법이 국회를 통과했으며 2018년부터 시행된다. 1997년 서울 보라매병원에서 환자의 인공호흡기를 뗀 의사와 가족이 살인죄로 기소되면서 ‘존엄한 죽음’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지 18년 만의 일이다. 이 법의 정신은 승산 없는 연명치료에 연연하지 말자는 것이다.

백남기 농민의 사망진단서에 대한 논란이 일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은 공식적으로는 외인사라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주치의가 병사로 고집한다면 사망진단서를 고칠 수 없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주치의 백선하 교수는 가족이 연명치료를 거절했기 때문에 병사라고밖에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제는 하지 말자고 하는 연명치료를 거부했다고 책임을 가족에게 미루는 의사라니…. 그러면서도 자신은 진정성이 있다고 말한다. 이완용과 전두환은 진정성이 없었겠는가. 의사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성이 아니라 정확한 진단이다.

백남기 농민은 돌아가셨다. 그의 죽음을 우리는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밝혀야 한다. 그게 백남기 농민의 삶과 죽음을 존엄하게 만드는 길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부검이 아니라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들을 수사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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