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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혁신 없는 기업국가의 서글픈 현실

입력
2015.09.24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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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경제학자 슘페터는 새로운 생산 방법과 상품의 개발을 기술 혁신으로 규정하고, 기술 혁신을 통해 창조적 파괴에 앞장서는 기업가를 혁신자로 보았다. 그리고 창조적 파괴가 자본주의의 역동성을 가져오는 가장 큰 요인이라고 주장했다. 슘페터의 주장에 의하면, 혁신적 기업은 경제성장의 필수 요소이다. 우리나라의 경제성장 역시 혁신적인 기업과 기업가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혁신으로 이뤄낸 우리의 번영 뒤편에는 여전히 극복해야 할 과제들이 놓여 있다. 사회적 양극화가 그것이다. 한국은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용 유연화 정책을 선택했다. 그로 인해 비정규직은 확대되고 소득 양극화는 심화되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용 유연화 정책을 추진한 이유는 경제가 회복되면 일자리도 원래대로 돌아오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의 우리 현실은 그렇지 않다. 지금 한국에는 혁신이 사라진 기업,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심화된 사회적 양극화만이 남아 있다.

오늘날 우리 기업에서 더 이상 혁신의 움직임은 찾기 어렵다. 대기업은 자신에게 유리한 법제도 하에서 지대(地代)를 추구하는데 몰두하고, 신제품과 새로운 시장을 개발하기보다는 하청업체의 이윤을 깎아 상품의 경쟁력을 높이는 손쉬운 방법에 안주하고 있다. 중소기업 역시 혁신보다는 대기업의 하청업체로 생존하는 방식에 익숙하다. 혁신의 부재(不在)는 곧바로 노동시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기업의 혁신이 사라진 2015년의 한국에서 비정규직은 기업의 이윤 획득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제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 노사정의 사회적 대타협은 이런 한국 사회의 서글픈 현실을 드러냈다. 여기에서 노사정은 비정규직 문제와 관련하여 상시ㆍ지속적인 업무에 대해서는 “가급적” 정규직으로 고용하고, 인건비 절감만을 이유로 한 비정규직 남용은 억제하도록 “노력”한다고 합의했다. “가급적”과 “노력”이라는 강제력 없는 합의 문구를 통해 경영계는 인건비를 낮추기 위해 비정규직을 사용하고 있음을 시인했다. 즉, 고용 유연성을 확보하고자 부득이하게 비정규직을 사용한다는 경영계의 과거 주장은 사실이 아니었다. 정부 역시 상시ㆍ지속적 업무에까지 비정규직이 일하고 있는 현실을 개혁할 의사가 없음을 솔직하게 밝혔다.

사실 정부는 작년 연말 노사정위원회에 ‘비정규직 종합대책(안)’에 대한 공식 논의를 요청할 때부터 이런 뜻을 내비쳤다. 이 때 정부는 35세 이상의 기간제 근로자가 신청할 경우 사용기간을 2년 범위에서 연장할 수 있도록 하되, 사용자가 그 이후 해당 기간제 근로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이직수당(연장 기간 중 임금의 10%)을 추가 지급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그리고 그 근거로서 기간제 근로자들이 사용기간 연장을 원한다는 조사 결과를 제시했다.

그런데 실제 이 정책의 성공을 위해 필요한 것은 사용기간을 연장할 경우에 기업이 얼마나 많은 기간제 근로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할 의사가 있는지 여부이다. 하지만 정부 자료에서 이에 대한 조사 결과는 보이지 않는다. 나아가 비정규직의 임금이 정규직의 절반에 불과한 점에 비춰 볼 때, 기업에게 그 임금의 10%를 부담시킨다 하여 정규직 전환율을 어느 정도까지 높일 수 있을지도 의문스럽다. 요컨대 이 제안은 기간제 근로자의 정규직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이직수당을 통해 기업이 4년 동안 안심하고 비정규직을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이 제안이 실제 입법화되었을 때 우리 사회에 미칠 영향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이직수당 제도가 정부의 희망처럼 혁신 없는 일부 기업의 생명을 연장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지만, 그로 인해 우리 사회가 치러야 할 대가는 수많은 비정규직들의 고용 불안과 소득 양극화의 심화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도재형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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